말로만 듣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양다솔의 기지개 켜기](4)

2022. 5. 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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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뻔했다. 귀를 의심했다. 그와 나는 몇 번의 데이트 끝에 그의 자취방에 온 상태였다. 갓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둔 음식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며칠 전 찜닭에 있는 당면이 그립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비건 지향인인 날 위해 닭을 뺀 비건 찜닭을 만들어준 참이었다. 뜨끈하고 달큰한 당면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오케이(OK), 아주 오케이인 상황이었다. 그의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일순에 모든 식욕이 사라졌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네. 겨우 두입 먹었는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 추운 날 치마는 왜 입어서는. 머리하는 데 40분 걸렸는데. 휴대전화번호는 차단하면 된다 치고, 집 주소는 왜 알려줬지, 미쳤나 보다. 비건 찜닭? 놀고 앉았다. 그냥 집에나 있을걸.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보지 못한 세계의 사람

수백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젓는 동안 만남 이래 가장 긴 적막이 찾아왔다. 마치 정글의 밤 같았다. 모든 곤충과 식물과 동물이 어둠 속에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만들어내는 가득 찬 고요. 그는 먹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뭔가 제대로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 듯했다. “왜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이곳에서 당장 사라질 수 있는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화장실 간다고 하고 일어서면 되나?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그가 비건 찜닭을 만들기 위해 납작 당면을 불리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번에 대통령 누구 뽑을 생각이야?” 그때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리기만 했다면 모든 것은 순조로웠을 것이다. 달큰한 당면처럼 미끄러졌을 것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말이다. 영겁 같은 침묵 끝에 나는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1번, 3번 말고 2번 확실해?”

나에게 이번 선거의 제목은 ‘1번이냐, 3번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그에 대한 토론이 어딜 가나 벌어졌다. 무효표에 대한 논쟁이기도 했다. 나와 동 세대들은 유일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3번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성세대는 1번을 천재라고 치켜세우며 너무 먼 미래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3번에 투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 2번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무조건 안 된다.’ 그것은 하늘은 파랗고 여름은 덥다고 말하는 것처럼 당연했다. 설명을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초면이었다. 그 존재는 말로만 들어왔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대.” 하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마치 유니콘처럼 실체가 없었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2013년, 내 소원은 ‘박근혜 뽑은 사람 만나기’였다. 사람들이 뽑은 후보는 2번이었다. 만나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그랬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내용이었다. 결과를 확인했을 때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장례식장 분위기였다.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종일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다녔다. 이해가 안 됐다. 왜 모두가 뽑았는데 안 됐지? 분명 한명도 빠짐없이 뽑았는데. 이 나라의 대통령을 만든 절반의 사람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의문이 깊어갔다. 여기는 어디고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그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의 한명뿐인 표본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낸 적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무조건 솔직하게 대답해.

“여기 카메라 설치된 것 있니?”, “인터넷 커뮤니티 하니?”, “성매매한 적 있니?”,

“n번방을 어떻게 생각하니?”, “세월호를 어떻게 생각하니?”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쩌면 그 모든 불가사의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왜 진정으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모든 것을 성실하게 시인하고 결백을 주장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완벽히 다른 사실들을 말했다. 그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고 자명한 것들일 테다. 그와 나는 같은 산의 앞면과 뒷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같은 하늘을 보고 노랗다고 말하듯, 하나를 놓고 전혀 다른 사실이 각각 자기만의 논리를 갖고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다른지 짚어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점점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말했다. 자신에게는 헌법 위에 사랑이 있으므로, 원한다면 내가 뽑으라는 번호를 뽑겠다고.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언어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헌법 위에 있어야 할 것은

세상은 다시 한 번 내 세계를 저버렸다. 식탁 앞의 외계인(外界人)이 이 세상에 대다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대화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도 이 세계의 일부라는 걸, 그것도 커다란 일부라는 걸 생각하면 그들과 공감대를 찾고 연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부터 들었다. 나는 2번이 전혀 아닌 세상에서 2번으로 결정된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절박하게 찾는다. “건강만 하자”고 서로의 손을 붙잡고 말한다. “내가 안일했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는데 내가 부족했어.” 엄마는 실의에 빠져 말한다. 앞으로 5년간 곳곳에 있는 노인정에 찾아다니며 식사 봉사를 하겠단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결정된 것이 엄마의 손에 달려 있기라도 했던 양. 겨우 열두가구 남짓이 모여사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한다.

내 세계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안일함을 탓한다.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본다. 대안학교 졸업자, 학교 밖 청소년,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통일운동가, 채식주의자, 성소수자, 대안학교 교사, 시민단체 직원, 비정규직자, 지방거주자, 최저시급 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취업 준비생, 장애인, 예술가, 기초생활수급자, 페미니스트, 무학력자, 무주택자, 무직자, 비혼주의자, 이민자, 환자, 비혼모, 과부, 이혼녀, 편부모 가정, 1인 가구…. 가난한 여자들, 가난하고 똑똑한 여자들. 젊든 나이 들든 건강하든 병들든 끝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 직업과 사는 곳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 월세를 살고 지하에 사는 사람들.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 남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 있는 힘껏 소리쳐 말해야 겨우 조금 들리는 사람들. 좌빨, 빨갱이, 메갈이라는 단어를 한 번은 들어본 사람들. 언제든 촛불을 들고 나가면 거기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 있었다. 나의 헌법 위에는 그 사람들이 있었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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