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 SF, 비유인가 현실의 공포인가[장르물 전성시대]

2022. 5. 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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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과거를 지배하는 이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이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이 유명한 명제가 새삼 떠올랐다. 2022년 애플TV에서 방영돼 호평받은 드라마 〈단절(Severance)〉을 보던 중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1984년〉에서 유달리 끔찍했던 건 집안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쌍방향 TV 겸 감시모니터나 사상경찰이 아니라 어휘사전 편집과 언론보도 조작을 통한 논쟁적 어휘들의 사회성 상실이었다. 대형(大兄)은 불온한 사상을 연상시키는 단어 자체를 아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발본색원한다. 대신 체제를 찬미하는 개념에 충실한 신어들을 꾸준히 쏟아내 사전의 비워진 공간을 바로바로 채운다. 일찍이 구조주의 언어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어휘에 대한 지식이 사고의 폭을 제약하고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항거’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면 그러한 속내를 알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지 않겠는가. 즉 언어는 의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드라마 <단절> 포스터 / 애플TV플러스


그런데 어휘조작 정도가 아니라 기억과 경험까지 임의로 편집할 수 있게 된다면 윈스턴 스미스를 외려 부러워하게 되지 않을까? 드라마 〈단절〉은 바로 이러한 근미래를 상정한다. 굴지의 대기업이 채용을 앞두고 해괴한 근무조건을 요구한다. 보안유지를 빌미로 직장에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기억은 전혀 하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퇴근하면 업무 내용은 고사하고 그날 직장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뇌시술을 받으란다.

얼핏 별문제 없어 보인다면, 당사자 입장에 서보라.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자신이 바깥에서 어떤 사람인지, 결혼은 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일단 출근하면 어제고 1년 전이고 회사에서 일어난 일만 기억난다. 회사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데도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거기에 쏟아부으니 마치 인생의 절반을 강탈당한 기분이랄까. 드라마는 미처 이런 부작용을 예상하지 못한 직원들의 정신적 공황을 그린다.

〈1984년〉처럼 심리세뇌요법이 아니라 아예 신경외과 시술을 통해 뇌의 부위별 편집이 가능해져 주어진 조건에 따라 특정 부위의 기억을 재웠다 깨울 수 있는 날이 올까? 현재 뇌과학의 발전양상을 볼 때 불가능해보이진 않는다. 과학자들은 인간 뇌를 시뮬레이션하는, 이른바 ‘뇌의 지도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유럽연합의 ‘인간 뇌 프로젝트(Human Brain Project)’와 미국의 ‘뇌 이니셔티브(BRAIN Initiative)’가 대표적이다. 2013년 IBM은 쥐의 뇌를 시뮬레이션했다. 유인원이 다음 목표란다. 원래의 연구목적은 유사의식을 지닌 인공지능 개발이지만, 연구의 진전에 따라 〈단절〉과 같은 용도로도 쓰일지 누가 알겠는가. 이를테면 하루 일과의 반쪽만 기억하는 사람들을 군인이나 스파이로 쓸 수 있다. 군수뇌부는 작전 수행 도중 아무리 잔학행위를 저질러도 퇴근 후에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병사들을 선호할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될 테니.

작가 어슐러 르 귄은 SF가 세상에 대한 비유라 했다. 하나 허구의 상상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될 개연성이 있다면 그것은 공포로 돌변한다. 장차 과학기술은 SF를 공포의 예언서로 만들까?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를 어찌 변모시킬지 사색하는 것이 SF라면, 〈단절〉은 제 몫을 해냈다.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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