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옛집, 미술을 만나다..다시 문 열린 운경고택

성연재 2022. 5.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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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작품전으로 기품 있는 고택과 만남

(서울=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운경고택은 제12대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雲耕) 이재형 선생이 살던 고택이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덕분에 이 집은 당대를 주름잡던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주인이 작고한 뒤 오랫동안 굳게 문을 닫아왔던 고택이 이따금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해당화가 핀 운경고택 [사진/성연재 기자]

서울 한복판에 이런 한옥이

서울에도 수많은 고택이 있지만, 운경고택은 다른 곳과 비교해 더욱 기품있고 정감 간다.

일단 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곳은 조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살던 곳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곳은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 도정궁(都正宮)이 들어섰다.

이런 위세 덕분인지 집은 약간 위쪽에서 사직단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집은 그곳에 살던 사람의 기운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올해는 운경 이재형 선생이 작고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운경은 1952년에서 1953년까지 상공부 장관에 재임했고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국회의장을 지냈다.

그는 1953년 종전 직후 1930년대 지어졌던 이 집이 매물로 나온 걸 보고 샀다.

운경고택의 독특한 창문 [사진/성연재 기자]

300평가량 부지의 운경고택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이뤄졌다.

북촌에 수없이 많은 한옥과 일단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될 만큼 넓다.

대문을 지나 서너 계단 올라서면 긍구당이 비스듬히 왼편으로 서 있다.

긍구(肯構)는 서경의 구절로 '조상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긍구당은 운경 선생 생전에 수많은 정객이 드나들던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곳은 사랑방 구실을 한 대표적인 한옥 사랑채로 평가받는다.

긍구당 오른편으로 난 작은 문을 지나면 안채다.

긍구당이 'ㄴ'자 모양이라면, 안채는 'ㄱ'자 모양이다.

그래서 겨울 추위가 매서운 서울의 북서풍을 잘 피할 수 있는 구조면서도, 한여름은 한쪽이 트여 있어 바람 소통이 자유롭다.

운경고택 종로구 운경고택 [촬영 성연재]

고택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

고택은 전시회나 문화프로그램인 운경좌담회 등 특별한 일정 이외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고택에 홀로 앉아 있으니 풍경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

시끄러운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고요한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짙은 라일락 향도 풍겨왔다. 때마침 안채와 대문 사이 공간에 심은 라일락이 만개했다.

많은 계절 중 라일락이 필 때를 맞춰 방문한 것 역시 행운인 듯했다.

안채에서 바라본 긍구당 [사진/성연재 기자]

안채 앞 연못엔 커다란 비단잉어 몇 마리가 놀고 있었다.

이쯤 되면 고택이 주인공인지, 고택을 둘러싼 생명체들이 주인공인지 알 수 없다.

건축물들과 나무, 꽃, 비단잉어 등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안채 오른쪽에는 키 높은 서부해당화 두 그루가 꽃을 한가득 피웠다.

검은색 기와 위로 높이 올라간 나무에 파스텔톤 꽃잎이 한가득 매달린 모습이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안채 앞쪽에는 희귀한 모양의 소나무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물어보니 백송이라고 한다.

분명 잎은 소나무 잎인데, 수피가 흰 얼룩무늬다. 플라타너스 수피와 비슷한 얼룩이지만 색상은 훨씬 더 희다.

활짝 핀 라일락 [사진/성연재 기자]

예전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나무였는데, 번식이 힘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수종이다.

충남 예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청나라 연경에서 가져와 심은 백송이 유명하다.

운경고택의 백송은 수령과 크기가 그 정도는 안 되지만, 그 자태 하나만 보면 더 아름답다.

이처럼 독특하고 기품있는 분위기 덕에 운경고택은 수많은 드라마와 광고가 촬영되기도 했다.

식객 등 널리 알려진 드라마 이외에도 해외에 한국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에도 자주 등장했다.

가장 최근에는 한국관광공사 미주 지역 홍보영상을 이곳에서 찍었다.

최근 이 고택에서 미술품 전시가 개관하면서 일반인도 운경고택을 다시 만나게 됐다.

'퍼니 게임' [사진/성연재 기자]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전시

육중한 나무 대문을 지나자 뜬금없는 고속도로 순찰대 마네킹이 보인다.

재단법인 운경재단이 세계적 현대미술작가 최정화 씨와 함께 열고 있는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전시다.

2019년 첫 기획전시 '차경, 운경고택을 즐기다' 이후 3년 만에 열린 두 번째 기획전시다. 운경고택을 배경으로 해 일상의 공예품을 예술 작품화함으로써 집에 대한 사유를 펼쳐냈다.

안채로 들어서니 안채 왼쪽에 전시물이 하나 눈에 띈다.

커다란 양은 대야를 찌그러뜨려 만든 천하 아줌마 대장군이다.

큰 양은 대야는 몸체가, 그보다 작은 대야는 머리가 됐다.

아래쪽을 떠받친 건 아프리카에서 온 나무 농기구다.

안채 왼편에는 커다란 배추 모양 풍선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하고 있다.

'천하 아줌마 대장군' [사진/성연재 기자]

이 공간은 아낙네들이 김장하던 곳이라 이런 작품을 전시한다고 했다.

거대한 무, 배추 등을 형상화한 작품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 소재는 대부분 이렇게 무 배추, 파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먹거리와 소품이 많다.

최 작가는 "나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뿌리 때문이 아니라 균사체 곰팡이 때문"이라며 "김치의 근본이 발효 유산균이듯,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아있어 이런 느낌으로 작품을 제작해 봤다"고 했다.

여러 생명체와 함께 조화롭게 자리 잡은 모습의 이 고택과 전시 콘셉트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아름다운 21세기, 성형의 봄' [사진/성연재 기자]

플라스틱 소쿠리 위 황금 여신상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누구나 다 소유하던 흔한 플라스틱 소쿠리를 갖고 놀며 쌓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과거 유물 가운데 우리가 쓰지 않던 물품이 없다는 점에 착안했어요.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삶이 되는 것이죠."

전시 작품들을 모티브로 소설가 최영 씨와 함께 쓴 '메타픽션' 소설 '춘야'(春夜)도 함께 출간됐다.

가상의 인물이 전시회와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용을 담았다.

최영의 소설 '춘야' [사진/성연재 기자]

INFORMATION

운경고택에서 열리는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전시는 '2022 공예주간'의 일환으로 6월 17일까지 진행된다.

일반 관람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5차례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있다.

오전 9시 30분과 11시, 오후 12시30분, 2시, 3시 30분에 입장한다.

5월 13일과 31일에는 오후 5시와 6시 30분에 야간 개장도 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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