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한국미술판, 이런 문전성시 없었다

노형석 2022. 5. 1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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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부산 10만 관객·746억 최고매출
이건희 컬렉션 전시도 연일 장사진
젊은층, 작품·NFT 등 투자대상 삼고
스타작가·독창적 콘텐츠 적어 한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 컬렉션 명품전을 보기 위해 건물 바깥 큰길가까지 입장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서너시간 줄서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짜증스러운 표정은 찾기 힘들다.

요즘 서울 북촌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선 희한한 풍경이 펼쳐진다. 평일인데도 아침 9시부터 정문 앞 바깥 차도까지 긴 줄이 생긴다. 주말에는 더하다. 전시장에 입장하려는 긴 줄이 건물 앞을 가로질러 뒤쪽 옛 종친부 건물까지 수백m나 이어진다. 지난해 7월 시작해 다음달 6일까지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 미술 명작’전을 보려는 관객들이 몰리면서 생긴 광경이다. 오전 10시 개관하기 한두시간 전부터 자리를 선점하려는 관객들의 ‘오픈런’ 질주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표를 구매해 입장할 수 있도록 한 지난달 12일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미술관 쪽의 말이다. 지금도 회자되는 2000년대 초반 간송미술관의 관람 인파를 넘어서는 열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 특별전을 관람 중인 관객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도는 덜하지만, 자리 선점 경쟁은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 기념전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도 다르지 않다. 평일 1500명, 주말 2100명 이상이 모이면서 벌써 누적 관객 3만명을 넘겼다.

지난 세기 근대미술이 도입된 이래 이 땅에 미술문화의 최고 전성시대가 열렸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미술’은 대중문화의 한류와 더불어 문화 소비의 최고 관심사가 됐다. 전시든 장터든 경매든 ‘미술’이 붙은 판만 벌어지면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지난 14일 낮 ‘2022 아트부산’ 입장객들이 부산 벡스코 본관 1층 전시관 앞에 줄지어 서 있다. 부산/노형석 기자

15일 부산에서 끝난 국제 미술품 장터 ‘아트부산’은 10만명 넘는 역대 최대 관객수와 역대 최고 매출액인 746억원의 성과를 올렸다고 주최 쪽은 다음날 밝혔다. 참가화랑들이 구체적인 거래 내역을 공개하지 않은 채 알려준 개별 판매액들을 합친 추산치여서 얼마나 객관적 사실을 반영했는지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 열린 아트페어에 서울 포함 외지 관객 상당수가 찾아와 관람할 정도로 전례 없이 인파가 몰려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청년 작가들의 인물·동물 캐릭터로 대표되는 신종 팝아트 그림과 밝은색 계통의 반추상 그림들이 대거 등장한 이번 페어에는 엠제트 세대 컬렉터와 애호가들의 구매 행렬이 초반부터 이어졌다. 젊은층 인기 작가들의 신작 근작들을 전진 배치한 소장 화랑들의 부스는 지난 12일 오전 최고 우대고객을 위한 사전 공개 때 이미 출품작 상당수가 매진됐다. 주말에는 관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부스 내부를 관람하는 전례 없는 광경도 이어졌다.

코로나19 사태가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등으로 점차 정리되는 시점에서 미술소비가 급팽창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미술 장르 자체가 문화계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며 소비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건 서구나 다른 아시아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오는 9월 예정된 세계적인 미술품 장터 프리즈와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한국 최대 장터 키아프의 공동 판매 전람회가 열리면 미술에 대한 열기는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화랑가의 가장 유력한 매출 수단이 된 아트페어는 이미 지난해부터 가파른 증가세를 나타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통계를 보면 지난해 열린 아트페어 숫자는 77개로 전년(35개)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새로 시작한 아트페어가 32개로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됐다. 올해도 이달 초까지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10개 이상의 새 페어가 열려 작품 시장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구실을 했다.

지난 12~15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미술품장터 ‘2022 아트부산’ 전시장 들머리 모습. 이상수 작가의 플라밍고 조형물이 놓인 좌대 겸 휴게시설에서 관객들이 쉬고 있고 그 너머로 국내외 화랑들의 출품 부스가 보인다. 부산/노형석 기자

미술 소비의 열기는 시각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해부터 부동산, 주식 등에 들어갔던 유동자금이 젊은 엠제트 세대의 작품 투자로 전환되면서 미술시장이 활황세에 접어들었고,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일반인들의 관심도 점증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체불가능 토큰이자 디지털 작품 보증서 양식인 엔에프티(NFT) 열풍으로 젊은층의 투자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고 엔데믹 이후 문화 소비의 촉과 방향이 이미 모판을 확실하게 깔아놓은 미술 쪽으로 더욱 집중되면서 관객 운집 현상이 나타났다는 분석들이 나온다.

서구 현대미술 흐름 일변도를 좇는 한계는 있지만, 미술시장도 원로 중견 작가의 단색조 회화와 청년 작가의 팝아트, 추상회화 쪽으로 콘텐츠 구색을 갖추면서 관객 소구력을 확보했다. 국공립 미술관의 전시회들도 박수근전, 조선의 승려장인전 등 과거 전시에서 보기 힘든 최상의 큐레이션 역량을 지닌 기획전들이 속속 등장해 미술 소비 촉진제 구실을 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 컬렉션 명품전 현장. 전시장을 메운 관객들이 김환기 등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하지만 ‘단군 이래 처음 미술이 대중의 보편적 관심사가 됐다’(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는 지금의 호시절이 오래갈 수 있을지는 확답을 꺼리는 미술인들이 대부분이다. 우려되는 측면이 적지 않게 보인다는 말이다. 고미술과 근대미술, 사진 등의 기초체력 영역 등은 투자 주축인 엠제트 세대들이 관심이 없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거나 아예 가격대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거장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들이 최근 들어 유지 보수의 어려움 등으로 외면당하면서 시장에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시장 기반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감상의 본령을 찾기보다 주식의 대체재이자 투자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부박한 단기 투자 행태들이 많다는 점, 한류처럼 세계를 주도할 만한 스타 작가나 독창적 브랜드의 콘텐츠가 별로 없는 것도 지적된다. 상당수 미술 전문가들이 “일정 기간 작품성 검증을 받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설익은 작품들이 엠제트 세대 취향을 업고 대표 작품처럼 시장 전면에 나오는 상황”을 우려한다. 올해 아트부산의 개막 직전 대표이사 해임 파문 등에서 보이듯 미술제도의 비상식적인 파행이 되풀이되는 것도 개선해야 할 걸림돌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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