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탄 뼈가 50cm 다발로.." 5·18 암매장 추적자의 기억

김용희 2022. 5. 1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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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에 흙무덤을 팠는데 나일론 끈으로 묶인 검은 뼈 다발이 나오니 얼마나 놀랐겄소."

13일 광주 서구 치평동 5·18민중항쟁기동타격대동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양기남(62·개명 전 양동남)씨는 1988년 9월의 초가을 밤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양씨는 "그땐 마음이 급했으니까 관할 기관의 승인도 얻지 않고 야밤에 암매장 의심 장소를 파곤 했다. 사람 뼈는 맞는데, 시커멓고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으니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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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그날의 진실]5·18 시민군 기동타격대원 양기남씨
망월동 묘지 2km 떨어진 공동묘지서
분홍색 끈 묶인 시커먼 유골들 발견
"행려자 주검이면 시립묘지 있을 것"
"국군통합병원서 민간인 주검 소각"
2019년 505보안부대 수사관 주장도
1988년 국회 광주 청문회를 앞두고 5·18 행방불명자 암매장 제보가 잇따랐던 광주 북구 효령동 한 야산에 있는 무연고 무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깜깜한 밤에 흙무덤을 팠는데 나일론 끈으로 묶인 검은 뼈 다발이 나오니 얼마나 놀랐겄소.”

13일 광주 서구 치평동 5·18민중항쟁기동타격대동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양기남(62·개명 전 양동남)씨는 1988년 9월의 초가을 밤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국회에서 5공화국 비리와 광주 학살 진상규명 청문회 준비가 한창이던 그때, 5·18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동료 네댓명과 함께 암매장 제보를 받아 광주 출신인 정상용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실로 전달하곤 했다.

양씨는 “경찰과 군의 감시를 피하려고 광주 양동에 여관방을 빌려 제보 접수용 사무실을 운영했다. 어느 날 광주 북구 효령동 주민한테서 ‘1980년 5월 효령저수지 근처 논에서 일할 때, 청소차가 공동묘지로 마대를 여러차례 옮기는 걸 봤다’는 내용의 제보를 받았다”고 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양기남씨가 13일 5·18기동타격대동지회 사무실에서 5·18 때 실종된 시민들의 암매장 의혹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양씨는 동료들과 새벽 시간에 제보받은 공동묘지를 찾았고 가장자리에 길이 1m, 높이 50㎝ 크기 봉분 네댓기가 나란히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망월동 묘지에서 직선거리로 2㎞ 떨어진 곳으로, 농사꾼 말고는 오가는 사람이 없는 지역이었다. 희미한 작업등에 의지한 채 봉분 하나를 파내려가자 분홍색 나일론 끈에 묶인 50㎝ 길이의 유골 다발이 나왔다. 양씨가 그동안 봐왔던 누런 빛깔이 아닌, 무언가에 그을린 듯 시커멓게 변색된 사람 뼈였고, 양으로 미뤄 1명 이상의 것이었다.

양씨는 “그땐 마음이 급했으니까 관할 기관의 승인도 얻지 않고 야밤에 암매장 의심 장소를 파곤 했다. 사람 뼈는 맞는데, 시커멓고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으니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양씨는 유골을 정상용 의원실로 보냈으나 “구청에서 행려자(노숙인)로 확인했다”는 답을 들었다. 양씨는 의문이 들었다. 1980년에 무연고자 주검을 화장했다면 광주 북구 망월동 시립묘지에 묻는 게 정상 절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래 무덤을 판 행위 자체가 떳떳하지 못했기에 문제 제기를 못 했다.

1988년 5·18 행방불명자 암매장 제보를 받은 시민군 출신 양기남씨가 검게 탄 유골을 발견한 광주 북구 효령동 효령제 위치.

양씨가 문제의 유골을 다시 떠올린 건 2019년. “5·18 때 국군광주통합병원 보일러에서 벙커시(C)유를 이용한 민간인 주검 소각이 이뤄졌다”는 허장환 옛 505보안부대 수사관의 주장을 들은 뒤다. 일부 5·18 연구자들은 허씨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양씨는 달랐다.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붙잡혀 고문 수사를 받다 8월13일 통합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위생병 최아무개 하사한테서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최 하사가 그랬다. ‘병원에 들어온 주검은 있어도 나간 주검은 못 봤다’고. 1986년 병원 주변을 탐문하다가 ‘5·18 때 병원 보일러가 계속 돌아갔는데, 그을음이 많이 날려 장독을 열어놓지 못할 정도였다’는 증언을 주민한테서 들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종배(67) 전 국회의원도 <한겨레>에 “당시 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을 임시 화장터로 만들어 화학부대 병사 2명이 작업을 했다고 들었다. 이 병사들은 이 일로 훈장까지 받았다”고 했다. 실제 1980년 6월20일 계엄사령부의 ‘충정작전 포상’ 현황을 보면 육군화학학교 ㄱ상병은 인헌무공훈장, ㄴ병장은 광복장을 받았다. 양씨는 최 하사와 주민 증언, 1988년에 봤던 검게 탄 유골, 2019년 허장환씨 주장이 서로 연결된다고 믿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진압 작전에 참가해 훈장을 받은 육군화학학교 병사들(붉은 사각). 국회보존자료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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