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5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윤수정 기자 2022. 5. 1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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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3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 12~3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5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선릉 산책’(정용준), ‘헬프 미 시스터(이서수)’ 입니다.

정용준 작가./문학동네
이서수 작가./은행나무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 정용준 ‘선릉 산책’

앎의 두 범주 사이에서 헤매는 사람들

『선릉산책』은 표면적으로는 사라짐에 관한 일련의 소설들을 수록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라지는 사람들뿐 아니라 잉여로 남은 존재들도 조명하고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 있다.

첫 작품, 「두부」는 이런 얘기를 전하고 있다. 화자의 치매에 걸린 ‘엄마’와 반려견이 함께 사라졌다가 엄마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누군가 데리고 있는 반려견을 잃어버린 개라고 생각하고 찾아온다. 그런데 사라진 사람의 손녀, 즉 화자의 딸은 그 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개는 ‘두부’일 수도 있고 ‘승희’일 수도 있다. 결국 화자는 개를 원래 데리고 있던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때는 개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노인은 이미 세상을 뜬 상태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사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독자는 여기에서 ‘상실은 결코 대체될 수 없다’는 작가의 인식과 대체물로 등장한 존재들로 인한 인지의 혼란을 다룬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 이 작품들의 숨은 뜻은 다른 데에 있다. 사려깊은 독자는 위의 이야기에서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손녀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그에 대한 ‘나’의 자각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곡절이 없는 건 아니다. ‘엄마’가 치매에 걸려 가족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엄마가 있는 곳엔 갈 수 없어 두부를 찾았다. 있을지도 모를 곳, 있어야 할 곳, 어디든 무작정 찾아다녔다. 나무는 자라고 풀은 마르고 가끔 벼락같은, 오묘한 형상의 구름 같은, 기이한 날과 달이 지나갔다. 숲속을 헤매는 유령을 두부라 믿고 따라갔다. 마른풀이 탈 때 피어오르는 연기가 두부인 줄 알고 불 속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두부를 부를 때마다 마음속으로 엄마도 불렀다. 하지만 부를 수 없었다. 엄마의 몸은 이제 없고 당연히 말도 웃음도 없다. 내 머리를 만져 주는 손가락도, 돌침대에 빨갛게 달구어진 따뜻한 살도, 엄마 냄새도, 없다. 엄마는 모두 잊었다. 우리 모두를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다. 두부만 기억난다 했다. 두부만 가족이라 했다.”(p.16)

한데 이 인용문은 실제 화자의 마음 상태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끓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다만 화자는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기묘한 환상적 비유로 ‘갈망’을 은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괴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잊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면 괴로우니까. 그리움은 괴로움이니까.

실제로 정용준의 소설이 파헤치는 것은 우리가 가진 망각과 무지에 대한 무의식적 충동이며(내가 ‘자발적 무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아주 중요한 잠재의식의 한 일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충동의 방기로 인한 삶의 파괴이다. 그 숨은 사연을 부상시키기 위해 작가는 앎의 범주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순수한 지식(정보)이며, 다른 하나는 이 지식을 현실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능력이다. 이 두 범주를 ‘지식’과 ‘지식 관리’라고 한다면, 이 분할을 통해 네 부류의 존재 양태가 나온다. 지식이 없이 지식 관리만 하는 존재, 지식만 있고 지식 관리를 할 수 없는 존재, 지식도 없고, 지식 관리도 할 줄 모르는 존재, 지식도 있고 지식 관리도 할 수 있는 존재.

작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첫 번째 양태에 속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 첫 번째 양태 자체가 아주 넓은 양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어서, 가장 왼쪽에는 지식 쌓기를 외면하고 지식 관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는 가짜 지식을 만들어서 지식 관리에 응용하는 사기꾼 부류가 있다고 본다. 정용준의 인물들의 대부분은 이 양 극단의 사이에 위치한다.

첫 번째 존재 양식에서 가장 왼쪽에 속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파피용이라니, 얼마만 에 발음해보는 불어인가. 프랑스어과를 졸업했으면서 간단한 단어 하나 말하는 것도 이렇게 낯설다니. 그땐 프랑스, 하면 막연히 멋있었지. 불어를 공부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더 멋있을 것 도 같았고. 그게 뭔지 몰라도 남들과는 다른 미래가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프랑스적인 미래랄까.”(p.92)

이를 읽으면 한국의 독자들은 상당수 자신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한편 가장 오른쪽에 속하는 존재는 이렇게 말한다.

“왜? 불편해? 저런 사람이 있어. 불행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저렇게 태어난 자들이. 마음속에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짐승을 깨우게 하는 묘한 힘이 있지. 가만히 있는데도 기분이 나빠지고 선량한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존재. 마녀들. 악마들.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 마녀가 되고 악마가 되는 게 아니야. 남들에게 나쁜 짓을 하게 만드는 존재들이어서 악마가 되고 마녀가 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존재가 바로 악마야. 그들은 항상 괴롭힘을 당해왔어. 이유 없이 돌에 맞아 죽거나 산 채로 불타거나 고문을 당했지. 이제 알겠지? 왜 기분이 나쁜지. 우지운이 악마여서 그래.”(p.132)

독자는 이런 조작에서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을 야기하는 ‘소시오패스’적 범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정용준 소설의 이런 구도는 오늘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를 상동(相同)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작가가 남몰래 그러나 집요하게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거의 비의지적으로 첫 번째 존재 양태의 왼쪽에 위치하는 데에서 삶을 연명하는 수단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심리 속에서.

“실은 미안한 마음도 없고 분노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피곤할 뿐. 말하기가 너무나 귀찮을 뿐.”(p.107)

또한 작가가 살며시 독자에게 부추기는 것은, 첫 번재 부류의 가장 왼쪽에 위치하는 성향을 거부하고 네 번째의 존재 양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양태의 존재들은 그 각성을 위해 주로 동원된다. 즉 지식으로 충만한데, 지식 관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존재들은, 인물들에게 일종의 인지적 방해물로 작용하여 그들을 각성 쪽으로 유도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 두 존재들 사이의 부조화와 소통이 더욱 천착된다면 그의 문학 세계는 훨씬 역동적인 단계로 돌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성차별의 구조적 인식을 위하여

이런 인생이 있다. 남자들의 무능으로 집안 경제를 떠맡은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에 안착하는 중에, 회식 자리에서 동료가 졸피뎀을 타서 약취한 후 성폭행을 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터진다. 가해자는 무릎 끓고 빌지만, 주위의 불편한 시선 때문에 정작 회사를 그만두는 건 피해 여성 자신이다. 집안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집안의 여인들은 무능한 남자들을 대신해 플랫폼 노동자로 살아간다.

이 소설에선 무엇 하나 속시원한 해결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의지와 다양한 실행들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구리터분하고 자갈더미가 가슴에 얹힌 것처럼 불편한 이야기가 주목을 받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에 대한 것이다.

우선 작가는 이 소설을 원래 ‘부부의 이야기’로 쓰려고 했다. 그런데 “나이대가 제각기 다른 여성 인물들”로 새 중심을 잡고 “그녀들을 떠올린 뒤 비로소 이 소설을 끝까지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이 소설은 아주 은밀하게도 한국 여인들의 긴 수난사를 복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성차별의 문제가 시끄럽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성차별은 현상적인 더러움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래된 구조적인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즉 성 선택의 진화사 도중에 형성된 구조적 차별이 문제이고, 이것이 사람들의 몸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일군의 여성주의자들이 ‘대물림 트라우마transgeneratinal trauma’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이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몸에 체화되어서 임기응변식 해결책들을 도로에 그치고 말게 한다. 한국사회에서 그 성차별은 안과 밖의 구별에 근거한 남존여폄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즉 남성은 바깥으로 진출하는 일을 담당하고 여성은 집안을 보존하는 일을 담당하게끔 한 집단적 결정이 남성들에게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여성들에게 보수적이고 주변적인 지위를 요구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성 간에 가능성의 범위가 달라진다. 남성들에게는 무한 출세에서부터 임시직 노동자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여자는 집콕 마님에서 임시직 노동자까지가 생의 범위가 된다.

물론 세상은 그동안 꾸준히 발전해서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현실의 무대에서 맹활약을 하는 여성들이 무수히 증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단 심리의 차원에서 이 구조적 문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균적인 수치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보조자의 지위를 여성들에게 요구하고 있어서, 아들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에서부터 부재하는 가부장을 대신해 집안을 떠맡는 억척어멈의 형상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실마리는 아마도 가사노동에서 성 분담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최근에 그나마 가사 노동의 역할을 분담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한 게 그나마 진보라고 하겠으나, 그조차도 구조적 구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즉 가사노동에 있어서 여성이 주도하고 남성이 주변적인 보조역을 맡는다면, 그 반대편에서의 구조적 차등도 그대로 유지하는 분위기를 존속시키는 데 에너지를 보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헬프 미 시스터』라는 건 심장을 스치는 아이러니를 감추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소설이 ‘밥 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것 역시, 작가가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가에 관계없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무엇이 중한가? 이 소설이 매우 답답한 분위기에 짓눌려 있다는 점을 앞에서 말했다. 그것은 글의 미숙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상황을 통째로 전달하는 효과를 가진다. 왜냐하면 대물림 트라우마는 당사자들의 몸으로 표현될 뿐 좀처럼 각성의 수준으로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헬프 미 시스터』는 현재의 소설 추세와 대립한다. 오늘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주관적 정서에 감싸여져 있다. 그래서 대체로 사소한 개인적 사건들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질 때에도 주관에 의해 해석된 것을 사회적 사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편적인 사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서 모종의 판단을 내리는데, 그 판단에 대해서, 작중의 중심인물이나 화자는 논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감성적 반응을 그렇게 간주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이 강한 작품일수록, 그 역시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인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다. 대중 소설의 성공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런 방향의 작품이 사회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만들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제시된 판단의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도 않다는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는 그렇게 사실과 판단을 구별하고, 추출된 사실들을 판단으로 덮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현상한다. 그럼으로써 상황의 복잡성과 더불어 인물들과 화자 역시 그 상황 속에 전이해의 상태로, 즉 체험적으로 섞여 있게 되는 사정을 보여준다. 독자 또한 그런 상황을 깨닫고 동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가 아니라 호기심과 궁금함을 먹고 사는 무지의 주체로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일종의 ‘상황참여주의 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한국문학사를 다시 들여다 보면, 이런 대물림 트라우마의 표백은 김동인의 데뷔작 「약한 자의 슬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여성은 왜 그런지도 모르는 채로 강자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마는데, 오늘의 소설에서는 그로부터의 절박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리라. 이게 보통 힘들고도 벅찬 일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작품 속 가족의 ‘플랫 폼 노동’이 이전의 직장노동과 평화로부터 얼마만큼 진화한 단계인지를, 그리고 이 단계가 인물들의 시무룩하고도 느릿느릿한, 그러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 세상 개편과 자기 극복을 위한 노력의 결과임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김연정 객원기자

◊ 정용준 ‘선릉 산책’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이래 보다 더 정비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만난다. 선릉도 마찬가지. 능침은 부드럽고 정자각엔 절도와 예법이 엿보이고 소나무는 수려하며 숲 사이로 난 길은 산책하기에 더 없이 고즈넉하다.

그러나 왕릉 산책을 한적하게 마쳤다면, 이는 우스갯말을 빌려 말하건대 잠자는 사자 곁을 사자인 줄 모르고 운 좋게도 무사히 지나친 것이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왕릉 모양으로 곤히 잠 자던 사자가 꿈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릉 산책이 평탄할 리 없다. <선릉 산책>은 도무지 평탄치 못했던 선릉에서의 하루-정확히는 하루 낮 아홉 시간을 담고 있다.

꿈틀거린 것은 능이 아니라, 선배를 대신해 1일 도우미로 나선 ‘나’와 함께 했던 자폐아 한두운이다. 아무 데나 침을 뱉고, 가끔 소리를 지르거나 도로에 눕는 한두운과의 하루가 평탄치 못할 것이라는 점은 진즉에 짐작된 터였고 역시 짐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두운이 여러 불량배들과 혼자 맞서게 되는, 게다가 그들의 모든 주먹을 날렵하고도 완벽하게 피하여 그들 스스로 겁먹고 물러서게 하는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 게다가 자기 분을 못 이긴 한두운이 제 얼굴을 수차례 가격하여 광대뼈가 찢기고 피까지 흘렸으니 ‘나’에게는 선릉이 고즈넉할 리 만무하고 하루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완강할 만큼 고요하던 능역이 꿈틀거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면 그것이 어찌 또 왕릉만일까. 한두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을, 왕릉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잠자는 세계가 품고 있을 크나큰 요동(搖動). 그것에 관한 존재론이 정용준이 소설에서 다루고자하는 바일 것이나, 작가는 그것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그것을 ‘알 수 없는’ 영역에 기어이 끝끝내 위치시킴으로써 알 수 없는 것의 존재론적 효용을 극대화한다.

작품마다 인물과 사건은 다르지만 언제나 ‘모를 것들’이 돌발하여 평탄한 듯한 일상을 불안스레 꿈틀거리게 한다. 두부인지 승희인지 알 수 없어 눈앞의 풍경이 왼쪽으로 기우뚱 기우뚱 흔들리는 것도 그렇고(<두부>), 가족에 닥친 재앙 앞에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아는 게 없다. 아무도, 누구도 모르겠다.’며 쏟아내는 절규는 어머니와 아들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의 것이다(<사라지는 것들>).

<두번째 삶>은 어떤가. 돕는 것과 괴롭히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되고, 유죄와 무죄가 뒤바뀌며, 말에 따라 선과 악에 대한 믿음이 뒤섞이는 사례를 특출한 스릴러로 연출해 낸다.

의지와 상관없을 뿐 아니라 아무 맥락도 없이 욕설이 튀어나오는 ‘이코’라는 인물의 뚜렛 증후군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약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한없이 끌려 나중에는 그에게 맞으면서까지 연민을 멈추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그를 죽이게까지 되는 ‘미이’라는 인물의 무력한 사랑도 정말 알 수 없다(<이코>).

<이코>에서는 그 ‘알 수 없는 것’에 치즈라는 귀여운 이름을 지어주는데, 치즈가 요동치는 양태는 결코 귀엽지 않아 일부러 귀여운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치즈가 이해와 납득의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귀여운 이름을 붙인 걸 보니 이해와 납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순간 비로소 이해와 납득이 성립되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려는 듯하다.

그렇다면 탈승화의 숭고미라는 말도 있듯이 치즈라는 것도 어쩌면 슬픔이 발효한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지. 잠 깬 사자라고 꼭 무서운 것만은 아닐 테니까.

◊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핼프 미 시스터>를 읽는 일은 누군가의 빈방에 들어가는 것만 같다. 실은 빈방이 아니다. 30년 된 15평짜리 낡은 빌라인 이 방에는 한 가득 가족이 산다. 양천식과 여숙, 그들의 딸 수경과 사위 우재, 그리고 손주 지후가 있다. 게다가 우재의 형 주재가 버리고 간 아들, 그러니까 사돈 집안의 아이라고 할 수 있는 열일곱 살 준후와도 한때 함께 살았고 열 두 살짜리 틴챗 유저 은지도 자기 집 드나들 듯한다.

가득 찬 방인데 빈 방처럼 보이는 까닭은 사람만 가득하고 도무지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도 없고 그 흔한 해바라기 그림 액자도 없으며 소파도 없고 책장과 화분도 없다. 없는 게 아니라 없는 것처럼 보인다. 숟가락과 젓가락, 밥 먹는 식탁, 수건과 헤어드라이어, 청소도구 등이 없을 리 없다. 다만 기호품이랄지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잉여나 과잉 혹은 허세적 취미를 엿볼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 다섯 식구의 벌이가 0원에 이른 적이 있었고 현재도 미래에도 잉여나 과잉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곧 이사를 가기 위해 여숙과 수경 모녀가 찾아다니는 방도 결국은 또 반지하방뿐이니 그곳에도 비싸고 멋진 그림 하나 걸릴 것 같지 않다.

직장 성폭행 미수 사건의 피해자로 방안에 갇혀 있던 수경이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방을 나서고 마침내 여숙과 양천식 우재 모두 연쇄적으로 배달과 대리운전을 시작한다. 모두 나가게 되니 방은 또 빈방일 수밖에 없다.

채우려야 채워지지 않는 빈방엔 결락과 박탈의 소슬한 기운뿐이다. 고된 택배 노동자 수경과 여숙, 뚜벅이 배달 양천식, 배달과 대리운전을 겸하는 우재, 남자들을 상대로 틴챗이라는 어플에서 자신의 사진을 파는 수지, 게임에서 코드를 뿌리고 회원으로 가입한 아이들의 배팅 금액 일부를 뜯는 ‘총판’ 준후. 돈벌이보다는 험한 사태에 다반사로 부딪히곤 하는 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 모두의 내면이 상실과 박탈로 비워진 방과 다름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빈방은 비어서 뭔가로 이제 다시 채울 수 있다고 소설을 말하려는 듯하다. 아니면 기호품은 없었어도 방에는 이미 의식주에 필요한 소중한 물품으로 가득했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려는 건지도. 그래서 텅 빈 마음도 다시 채우거나, 미처 돌보지 못해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한 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랑과 연대의 온기를 찾아 되살리기를 바라는 건지도.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삶과 노동을 다루되 이 이야기는 플랫폼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특히 시스터, 즉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여성 노동 그리고 여성 주체에 관한 문제를 방 밖으로 드러낸다.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아직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돼 보지 못했다는 말에 누구도 실소 따위 흘리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기적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테니까.

하지만 기적도 처음은 작은 것에서 싹트는 법. ‘헬프 미 시스터’라는 어플 세상이 그것이다. 여성만 가입할 수 있는 곳. 누구든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제공하는 곳. 위에 인용한 수경의 독백―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이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픈 문장이었다면 어플 헬프 미 시스터에 뜨는 ‘……을 부탁합니다.’ ‘……를 구합니다’등의 다양한 요청문구에 대한 수경 남편 우재의 해석은 가장 희망적인 문장이었다.

“요구사항이 참 다양하다. 그런데 핵심은 하나네.”라고 말한 뒤 내린 요청문구들에 대한 우재의 해석은 이렇다.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당연한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야말로 어쩌면 일원되기 기적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서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조금의 잉여와 과잉도 없이, 빈방에 정돈된 생필품의 명료함으로 문장을 다듬어 적는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교수. / 오종찬 기자

◊ 정용준 ‘선릉 산책’

“황당했고 놀라웠고 나중엔 견딜 수 없게 화가 났다. 하다하다 이제는 엄마까지. 그러잖아도 되는 게 하나도 없고 하루하루가 거지 같은데 왜 엄마까지 징징거리는 걸까. 엄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나는 속엣말을 퍼부었다. 짜증난다. 잔인하다. 너무한 거 아니야. 엄마라는 자가 아들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제발 좀 살자. 나 너무 힘들어. 엄마가 아니어도 하루하루가 죽을 것 같아.”

그만 살기로 했다고 선언하는 엄마에게 아들이 보인 반응이다. 물론 ‘아들은 되는 일이 없고 하루하루가 거지같’다. 그래도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한 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아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는 없다. 미화나 신비는 물론 절제나 엄숙함도 보이지 않는 문장이 아닌가. 그것은 이 작가가 낭만적 과장이나 고전적 절제와 거리를 두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용준의 문장이’사라지는 것들’의 엄마가 그런 것처럼 하이쿠에 이르기를 바라는 건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런 문장으로 그려진 장면이 더 생생해서 인물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왜일까.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문장에 의해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서, 말하자면 너무 친숙해서 불편할 정도다. 인물들이 작가의 문장에 의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불쑥 독자의 눈앞으로 육박해오는 것 같다. 소설 속 인물 미스터 심플에 대해 ‘나’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자문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말 그대로 심플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째서인지 그는 절실해 보였다.”

말은 심플한데 태도는 그렇지 않다. 절실해 보인다. 내가 이 소설집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다. 심플과 절실함의 조합은 이 인물의 미스터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소설집 전체의 비밀이다. 17음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포인트를 17음으로 늘이는 것이라는 하이쿠에 대한 어떤 견해를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알 듯 모를 듯한 일이 많고, 어떤 일은 영원히 알아낼 수 없다. 예컨대 ‘심플’은 단순한 압축이 아니라 알 듯 모를 듯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절실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포착되었다고 한들 ‘말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말해지겠는가. 말해진다면 그것이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의욕이 절실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겠는가.

◊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설득력이 디테일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플랫폼 노동자 가족들의 이야기인이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취약한 장면을 카메라로 찍듯 보여준다. 그가 들고 있는 카메라는 성능이 좋아서 세세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돈이다. 돈이 제일 무섭고 가장 중요하다. ‘돈이 곧 마음이 되는’ 세상에서 생계를 위해 뛰는 이들의 현장이 너무 사실적으로 드러나서, 이건 마치 다큐멘터리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된다. 지능적인 착취의 시스템인 플랫폼과 타인의 호의를 의심해야 하는, 특히 여성들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 적이 되어 있는 남녀 관계, 너무 일찍 돈이 지배하는 어른의 세계에 편입해 들어온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초상을 보는 듯해 민망하고 부끄러워진다. 작가의 담담한 어조가 그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러니까 이서수의 이 소설은 세상 한 귀퉁이에 세워둔 큰 거울과 같다. 좋은 거울은 현실을 제대로 비춤으로써 보는 이들을 깨달음과 반성으로 이끈다. 이 소설 곳곳에 나타나는 세세하고 빈틈없는 디테일은 이 거울이 얼마나 믿음직한지 알려준다. 가령 이런 대목.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엔 30롤짜리 두루마리 휴지를 끼우면 딱 들어맞고, 10킬로그램짜리 쌀 포대는 조수석 발치에 놓으면 된다. 비교적 부피가 큰 박스의 개수와 크기를 미리 확인한 뒤 테트리스 하듯이 차 안에 물견을 쌓는 방법이나, 봉투에 담긴 물건들은 대시보드 위나 뒤쪽 창 아래에 쌓아놓으면 된다는 것, 길이가 1미터 이상인 물건은 뒷좌석에서 조수석에 이르기까지 가로질러 실을 수밖에 없다는 것, 운전석과 조수석 바로 밑은 리필용 세제를 두기에 맞춤한 크기이며 부피가 적당한 박스 하나를 남겨놓았다가 조수석에 실으면 마무리가 깔끔하다는 것, 나아가 그것이 첫 번째 배송지에 배달할 물건이라면 조수석을 미리 비워놓을 수 있어 공간적으로 덜 답답하다는 것도 그동안 깨달은 비법들이다.”

충실한 취재와 반복적인 실험의 결과물임을 방증하는 이런 실사화면 같은 서술을 통해 이 소설은 점점 심각해지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한 구조를 끈질기게 환기 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어쩌면 그에 맞설 대안으로 가족과 연대를 강조하기도 한다. ‘가족은 불행한 미래를 함께 방어하는 존재’이다. 물론 이 거대하고 교활한 착취 구조를 무너뜨릴 만한 위력을 가진 것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이 소설의 사실적인 거울을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이 기적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희망처럼 읽히지 않고 기도처럼 읽힌다. 그들 가족이 한마음으로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 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이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수경은 액셀을 힘껏 밟았다. 그들의 차가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갔다.”

마지막 문장이다. 액셀을 밟으면 차는 앞으로 나간다. 힘껏 밟으면 힘차게 달려나간다. 그리고 ‘수경’이 운전하는 그 차는 ‘그들의’ 차이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이명원 기자

◊ 정용준 ‘선릉 산책’

아내와 아들과 헤어지고, 직장이었던 오케스트라에서도 해고된, 그래서 남은 거라고는 더는 쓸모없게 된 악기와 악보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이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으나 마음대로 처리되지 않는 그들의 짐이 전부인 사람이 있다. 한때는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호른연주자였던 이 사람의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 아이디는 ‘미스터 심플’이다. 삶이 간결해지다 못해 간소하기 짝이 없게 되어서 이런 아이디를 스스로 붙였을까. 이 사람의 아이디는 원래는 ‘미스터 슬픔’이었다. 누군가 그 슬픔이란 아이디를 오독했고, 심플이 더 낫다고 했고, 본인도 그렇다고 여겼다. 슬픔과 심플 사이, 정용준의 소설집 ‘선릉산책’에 실린 일곱편의 단편소설들은 그러하다. 슬픔이란 원래 가득가득 고여있다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것일 터인데, 정용준은 간결한 문장으로 감정을 누르고, 그 감정이 스며 배인 삶의 이면을 다시 한번 누른다. 어떻게 해도 삶은 심플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소설은 더욱 치밀해지고, 더욱 단단해진다.

정용준의 소설은 상실로 가득차있다. 아내를 잃은 사람, 자식을 잃은 사람, 개를 잃고 고양이를 잃은 사람들. 그리하여 모두가 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를 잃은 사람들. 그래도 삶은 계속 되어야할 터이므로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여행을 간 곳에서 다시 홀로 떠나고,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새도우복싱을 하고, 누군가는 복수를 꿈꾸기도 한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일들인데, 기묘하게도 정용준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일상 바깥의 일들로 읽힌다. 어째서 나의 일상이, 화자들의 일상이 이토록 낯설게 여겨지는가. 그 낯섦은 왜 나를 더 슬프게 하는가. 일상의 상처는 면역되지 않고, 익숙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일 것이다. 상처와 상실은 결코 심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또한 알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정용준의 낯설고 익숙한 상실의 이야기들은 우리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울린다. 그 울림은 아마도 미스터 심플이 연주하는 호른의 음을 닮았을 수도 있겠다.

◊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의 소설 ‘헬프 미 시스터’는 장인장모, 플랫폼 노동자인 부부, 그 부부의 조카들이 함께 살아가는 집의 이야기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이다. 이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모두가 간당간당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뼘만한 집에 모여 뒤엉키다시피 살아가는데, 서로가 서로의 아슬아슬함을 알아서인지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일에 아낌이 없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들은 왜 싸우지 않는가.

그들에게 함께 싸워야할 다른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딸, 그들의 누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힌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다. 표면적으로는 직장내 성폭행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을 겪게 된 주인공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단지 한 개인이 맞닥뜨린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들이 싸워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지켜나가야하는 삶이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하고, 먹어야하고, 집을 구해야한다. 그러면서 상처입은 사람을 지켜줘야한다. 가족, 지인, 친구, 이렇게 단단한 결속의 이름을 가진 존재들은,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들이 지켜줘야한다고 믿는 사람보다 더 초라한 사람들이다. 한없이 초라해서 애잔하기까지 한 이 존재들은 심지어 한없이 선량하다.

폭력을 이겨나가는 방식, 폭력을 해석하는 방식은 여럿 있을 것이다. 소설이 취할 수 있는 자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서수의 자세는 온화함이다. 그리고 이 온화함의 힘은 강력하다. 아무리 초라한 사람들이라도 끝내 같이 있을 때 그 결속의 힘이 얼마나 단단할 수 있는지 , 조밀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화자들에게 고루 시선을 주어 모두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도 아마 이 작가의 온화함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자기 몫만큼의 할 말이 있다. 삶의 중심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든, 하고 싶은 말, 해야할 말은 공히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직 자신에게만 중요한 말들이다. 이 말들을 타인에게 가닿게 하는 것이 소설의 힘이다.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가 그렇다.

◇김동식·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김동식.

◊ 정용준 ‘선릉 산책’

정용준의 소설집 ‘선릉산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렸던 말은 타자(他者)였다. 꽤나 오랜 동안 논의되었기에 친숙하면서도 여전히 막연한 의미로 다가오는 단어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타자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회철학에서는 체계적으로 배제 또는 억압된 존재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주체를 호명하는 상징적인 질서를 가리키기도 한다.

정용준의 소설에서 타자는 언어 규범(code)을 달리 하기에 그 정체가 파악되지 않을 뿐 아니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 너라는 근본적인 관계가 출현하지 않는다. 단편 「두부」에서 두부라고도 불리고 승희라고도 불리던 강아지, 단편 「미스터 심플」에서 당근마켓을 통해서 쿨거래를 하는 남자들, 그리고 단편 「선릉산책」의 기본적인 대화가 이루어지 않는 자폐증 환자 한두운이, 정용준 소설의 타자에 해당한다.

언어 규범을 달리 하는 타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특정 공간을 공유하고 대화일 수 없는 대화를 나눈 기록이, 정용준의 소설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는 자신이 두부였는지 아니면 승희였는지 끝내 말해 주지 않았고, 숨겨두었던 슬픔을 잠시나마 내보였지만 중고거래를 마치면 그뿐이고 앞으로 기억하는 일도 없을 테고, 한두운을 위해 헤드기어를 벗겨준 것이 어떠한 의미로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다.

불확정적인 글쓰기 또는 미결정의 상태에 대한 글쓰기는, 언어 규범을 달리하기에 정체를 알 수 없고 소통도 되지 않는 타자와의 만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언어 규범을 달리 하는 타자와 마주한 언어란, 언어와 비(非)언어의 경계를 산책하는 일과 유사하고, 언어가 대화적 소통을 위해 목숨을 건 비약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용준의 작품들이 언어와 타자가 형성하는 그 어떤 경계로 우리를 이끌었을까.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다.

◊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오늘날 사람들을 뭘 해서 어떻게 먹고 사는 것일까. 한국근현대소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가는 현진건이다. 소설 「운수 좋은 날」을 통해서 인력거꾼 김 첨지와 먹지 못한 설렁탕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1920년대의 작가 현진건이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실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서수의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를 읽는 동안 불쑥불쑥 현진건이 연상되곤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서수의 장편소설이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 중류 이하의 계층은 뭘 해서 어떻게 먹고 사는지를 집요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준비, 경력단절, 직장 내 갑질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은 많지만, 노동하는 여성을 중심에 두고 한 가족의 생계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은 결코 흔하지 않다.

‘헬프 미 시스터’는 택배, 대리운전, 배송 라이더, 선물 투자 등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며 가족경제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플랫폼 노동은 스마트 폰이 일상화되면서 앱과 SNS 등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노동력이 거래되는 근로 형태를 말한다. 주인공 수경은 직장 회식에서 동료가 건네 준 졸피뎀이 섞인 음료를 마셨고, 자칫하면 성폭행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으로부터 어렵게 벗어난 일이 있었다. 부당하게도 수경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4개월의 칩거 끝에 ‘헬프 미 시스터’라는 앱을 통해서 배송 일을 시작한다. 구직자와 의뢰인이 모두 여성이며 자차로 배송을 하는 방식인데, 여성이 다른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소설의 독자로서 말하자면, 엄마 여숙의 일생이 인상적이었다. 여숙의 일생은 척추관절병원의 미화원, 순대공장의 직공, 코다리 식당의 종업원, 해변의 쓰레기를 줍는 일용직을 거쳐 이제는 딸과 함께 플랫폼 노동을 하고 있다. 여숙의 삶은 그녀가 거쳐 온 직업의 목록으로 대변되며, 그녀의 노동은 딸 수경을 키웠고 가족을 먹여 살렸다. 지금은 수경의 노동이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먹여 살린다. 장편소설로서는 아쉬운 점이 산견되기도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사는지 그리고 여성에게 노동이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정면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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