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감사 지정.. 기업 부담 2배로
양변기용 부품 개발 중소 업체인 와토스코리아는 올해 외부 감사 비용으로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많은 비용을 지출할 상황에 놓였다. 이 회사는 지난 10여 년간 한 회계 법인에 감사를 맡겨왔는데 2019년 시행된 새 외부 감사 규제로 인해 올해 정부가 다른 회계 법인을 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공석 와토스코리아 대표는 “그동안 우리 회사는 세무조사 한번 안 받을 정도로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해왔는데 왜 이런 법을 만들어서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지 모르겠다”면서 “올 들어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매달 적자를 보고 있는데 기존 6000만원이었던 감사 비용까지 2배 이상 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기업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외부감사인(회계법인) 지정제’로 인해 감사 비용·시간이 크게 늘어나 경영계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 제도는 상장사가 6년 연속 자율적으로 회계 법인을 선정해 감사를 맡겼다면, 이후 3년은 정부가 지정한 회계 법인을 선임하도록 만든 규제다. 금융 당국은 제도 시행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매년 일정 수만큼 기업을 나눠 분산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 도입 이후 감사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크게 증가해 기업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견 A사의 경우 올해 지정 감사를 받게 되면서 비용이 예년보다 2배 가까이 뛰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기존에는 여러 회계 법인 중에 한 곳을 선정하기 때문에 가격 협상력이 있었는데, 정부가 한 업체를 지정하다 보니 기업들의 가격 협상력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최소 감사 시간을 법으로 정한 것(표준감사시간제)도 감사 보수 증가의 원인이 됐다. 지난해 10월 한국상장사협의회가 상장사 291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1.1%가 이 규제로 경제적 부담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정상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 감사인 지정제를 도입한 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기업 사정을 잘 모르는 정부가 감사인을 내리꽂는 것은 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주기적으로 외부감사인(회계 법인)을 지정하는 규제를 도입한 것은 대우조선해양의 분식 회계 사건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은 2012~2014년 매출액을 실제보다 부풀리거나 자회사의 손실을 반영하지 않는 방식으로 회계 장부를 조작해 5조원대 분식 회계를 저질렀다. 당시 외부 감사를 맡았던 회계 법인이 대우조선해양의 분식 회계를 방조한 것으로 드러나자 정부는 기업의 회계 부정을 막겠다는 목적으로 정부가 지정하는 회계 법인이 외부 감사를 하도록 규제를 만든 것이다. 규제 도입 이후 정부로부터 감사인 지정을 받은 회사는 2019년 1224사, 2020년 1521사, 2021년 1969사로 매년 늘고 있다.
◇규제 도입 이후 감사 비용 2배 증가
외부감사인 지정제 시행 이후 기업 현장에서는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한 회사당 평균 감사 보수는 2017년 1억2500만원에서 2021년 2억8300만원으로 12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CEO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2017년 대비 지난해 KT&G는 556.4%, ㈜한진은 566.7%, 해성산업은 993.9% 감사 보수가 증가했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기업이든 일반인이든 계약할 때는 계약 자유 원칙에 따라 여러 업체를 놓고 자율적으로 조건을 따져가며 계약하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정부에서 지정해준 업체하고만 계약을 맺어야 하다 보니 기업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달라는 대로 돈을 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감사 시간도 크게 증가했다. 한 중소 제조업체 대표는 “기존에 업무를 쭉 해왔던 회계 법인은 그동안 우리 회사를 계속 들여다봤기 때문에 감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정부가 지정한 회계 법인은 회사 사정을 잘 모르니까 이런 저런 자료를 들여다보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 한 회사당 평균 감사 시간은 2017년 1700시간에서 지난해 2742시간으로 급증했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감사 시간은 2017년 대비 64.8%, 포스코는 87.4%, SK하이닉스는 149%, 한화솔루션은 149.4% 늘었다.
◇회계 법인 갑질에 기업들 냉가슴
기업 현장에서는 이외에도 외부감사인 지정제의 문제가 수두룩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예전에는 제출하지 않았던 자료를 지정 회계 법인이 요구한다” “지정감사인의 고압적인 자세로 인해 원만한 소통이 어렵다” “회계사들이 쓰는 감사 시간이 정말 다 필요한 시간인지 의문이다” “감사 법인이 너무 자주 바뀌니 본업무보다 감사인 인터뷰에 쓰는 시간이 더 많다”는 하소연이다. 기업이 마음대로 회계 법인을 바꾸지 못하는 상황을 알고 정부로부터 지정받은 회계 법인이 기업을 대상으로 일종의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기업 10곳 중 6곳은 외부감사인 지정제 이후 감사 품질에는 변화가 없다고 답했다.
그나마 비용과 인력의 여유가 있는 대기업들은 감사인 지정에 따른 각종 부작용을 감내할 여력이 있지만 자금·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새 규제로 인해 경영 환경 자체가 악화된 상태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사실상 공기업인 대우조선해양이 회계 부정을 저지른 것 때문에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버거운 민간 중소기업에 이런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처사”라면서 “부작용이 심한 외부감사인 지정제 대신 내부 고발 활성화, 분식 회계 처벌 강화, 내부 회계 관리 제도 강화와 같은 근본적인 대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융 당국 관계자는 “감사 비용과 감사 시간이 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면서도 “제도 시행 초기이기 때문에 제도의 실효성을 파악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하고 향후 성과나 개선점을 파악해서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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