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순종, 식민 통치 미화작업에 끌려다녔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2022. 5.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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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식민 조선의 왕, 왕공족 ②1917년 순종의 천황 알현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순종 일행이 신의주까지 다녀온 서순행(西巡幸)을 기념해 촬영한 단체 사진이다. 가운데 대한제국 황제 융희제 순종이 앉아 있고 왼쪽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다. 나라가 망하고 7년이 지난 1917년 6월, ‘조선 창덕궁 이왕’에 책봉된 전 제국황제 순종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 천황이 책봉한 왕족 자격으로 천황 다이쇼를 알현했다. 중국에 사대했던 조선 500년사에도 없었던 초유의 일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https://youtu.be/GdcmvXC7qAU 에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왕 전하 도쿄로 납신다’

1917년 6월 3일 총독부 기관지 격인 ‘매일신보’ 2면 한가운데에 군복을 입은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순종) 사진과 함께 이런 기사가 실렸다. ‘李王殿下御東上(이왕전하어동상) - 8일 경성 출발 약 2주간 체류’. 이왕전하는 순종을 뜻하고 ‘御(어)’는 왕 관련 용어에 붙이는 접두어다. ‘東上(동상)’은 ‘동쪽으로 간다’는 뜻이다. 식민 본국인 일본 수도가 도쿄(東京)이니 ‘東上’은 도쿄로 납신다는 뜻이다. 지금 서울로 갈 때 상경(上京)한다는 말과 동일한 맥락이다. 식민 시대 기준은 도쿄였다. 경부선 철도는 부산행이 상행선이었고 경성행이 하행선이었다. 그러니까 7년 전인 1910년 9월 1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고 사흘 뒤 창덕궁 인정전에서 당시 천황 메이지(明治)에 의해 조선 이왕으로 책봉된 순종이 후임 천황 다이쇼(大正)를 알현하기 위해 조선을 떠나 일본 도쿄로 간다는 뉴스였다. 명과 청 왕조를 통틀어 중국에 사대했던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도 없었던 입조(入朝: 사대 본국에 가서 인사를 하는 행위)였다.

1917년 6월 3일자 ‘매일신보’. 이왕 전하(순종)가 도쿄로 가서(東上·동상) 천황을 알현한다는 기사다.

302. 식민 조선의 왕, 왕공족 ②1917년 순종의 천황 알현

침묵 속에 진행된 책봉식

한일병합을 주도했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순종을 ‘대공(大公)’으로 격하시키려 했다. 대한제국 쪽 협상 주도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王) 지위를 유지했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고마쓰 미도리(小松緑·전 통감부 외사국장),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 1976, p283) 일본 내각 또한 이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전주 이씨 황실은 왕족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 황제 고종은 덕수궁이태왕, 순종은 창덕궁이왕에 책봉됐다.

1910년 9월 1일 천황 메이지가 보낸 이왕 책봉 칙사가 창덕궁 인정전에 도착했다. ‘왕 전하도 칙사도 침묵 속에 있었고 양측 수행원은 석상처럼 숨죽여, 엄숙했다는 말밖에 형언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이왕은 ‘대한제국 황제 의장을 갖춰 입고 영국식 의전복을 입은 기병 호위 속에 황제 깃발을 펄럭이는 마차를 타고’ 총독 관저를 찾아갔다. 생애 마지막 제국 황제 의장이었다.(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전 대한제국 궁내부 사무관 등), ‘대한제국황실비사’, 이마고, 2007, p103, 104)

이토 히로부미의 계산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제 고종을 퇴위시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그해 12월 고종과 엄귀비 사이 아들 영친왕 이은을 도쿄로 보냈다. 영친왕은 순종에 이어 조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였다. 열 살 먹은 왕세자는 1963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귀국이 허용될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히로부미는 갓 황제가 된 순종을 통감 자격으로 배종해 1909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북쪽과 남쪽으로 순행(巡幸)시켰다. 경성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여행한 1월 여행을 남순행, 신의주까지 북상하고 돌아온 2월 여행을 서순행이라고 한다.

왕세자 영친왕 유학은 명목상 권력자인 전주 이씨 황실을 식민체제에 정신세계부터 길들이려는 조치였다. 이왕 순행은 조선왕조 내내 대중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군주를 대면시켜 식민 조선인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일본 전국에 여행시켜 ‘근대화 방법을 놓고 분열돼 있던 여론을 결집시키고 중앙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메이지 유신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작업이었다.(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서순행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31, 동북아역사재단, 2011)

남순행과 서순행

“나는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도탄에 빠진 백성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하여 직접 지방 형편을 시찰하고 그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한다.”(1909년 1월 4일 ‘순종실록’) 그리고 사흘 뒤 순종은 궁내부 관료 41명, 대한제국 내각 42명, 통감부 요원 13명을 데리고 경성 남대문역에서 열차에 올라 대구~부산~마산~경성으로 6박7일 대장정에 올랐다. 철길 매 5~10리마다 일본 헌병이 경호하고 연도에는 한일 두 나라 국기를 든 학생들이 도열했다.(‘내각일기’, 순행시제반준비략(巡幸時諸般準備畧):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남순행 연구’, 정신문화연구 30권 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재인용)

대한제국 황제가 민정 순찰에 나섰는데 경호는 일본 헌병이 하고, 환영 인파는 일장기를 들었다. 목적지 가운데 한 곳인 대구에서는 “이등박문이 황제를 일본으로 납치하려고 한다”며 철길에 드러눕는 일도 벌어졌다.(‘통감부문서’ 9권, 8. 한국황제남순관계서류 (54) 이토 통감 연설 후 한민의 반향 및 봉영 상황) 작은 소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월 7일 오후 3시 25분 순종이 대구에 도착했다. 예포 21발이 열차를 환영했다.

부산과 마산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는 기차역 앞과 교차로마다 환영 문(門)을 세웠고 일본 육해군이 도열해 환영했다. 1월 8일 오전 9시 40분 부산에 도착한 순종 일행은 일본 천황 메이지가 보낸 축하 전보를 받았다. 내용은 ‘일본 함대를 부산과 마산으로 보내 경의를 표한다’였다. 다음 날 부산항에서 일본 해군 장갑순양함 아즈마(吾妻)함이 예포 21발을 쏘았다.

부산을 떠난 순종은 마산을 거쳐 12일 귀경길에 대구에 다시 들렀다. 대구에서는 전 시민이 환영과 환송에 동원됐다. 순종은 달성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은 도로를 개수하고 만국기를 달고 가짜 꽃으로 겨울나무를 장식해놓은 상태였다. 노인들 가운데 일본인은 순종 자리 옆에 따로 자리를 만들었고 조선인 노인 240명에게는 선물을 하사했다. 통감 이토는 별도로 조선인 유력 인사들에게 통감 정치를 정당화하는 연설회를 가졌다.(위 문서 (53) 한국 황제폐하 일행 봉영송 상황 보고 건)

1월 13일 창덕궁으로 돌아온 순종은 14일 뒤인 27일 다시 신의주를 향해 7박8일 여정으로 서순행을 떠났다. 여정은 평양~의주~신의주~평양~개성~서울이었다. 이 또한 통감부가 계획해놓은 순행이었고, 순행 규모는 남순행보다 늘어난 279명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빌려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감부는 관보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가 2명을 따로 고용해 전 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남순행과 서순행 전 일정에 걸쳐 통감부와 일본에 거칠게 저항하는 민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구시대 권위를 상징하던 황제를 앞세운 선전극은 성공적이었다. (이왕무, 앞 ‘서순행’ 논문)

2017년 4월 대구 중구청은 순종이 걸었던 달성공원 앞 도로를 ‘순종황제 남순행로’로 조성하고 순종 동상을 세웠다. 국비 35억원을 포함해 74억원이 투입됐다. 동상 앞에는 ‘시대 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적혀 있다. 대구 중구청은 ‘치욕의 역사도 보존한다’는 ‘다크 투어리즘’의 일환이라고 홍보했다.

2017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 앞에 국비를 포함해 74억 원을 투입해 중구청이 만든 ‘순종황제 남순행로’와 순종 동상. 이토 히로부미가 주선한 1909년 1월 대구 방문을 기념하는 동상이다. 동상 앞에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새겨져 있다./박종인 기자

허수아비로 끌려간 도쿄 알현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년이 지났다. 1917년 5월 9일 순종은 전주 이씨 황실 본궁인 함경도 함흥으로 참배를 떠났다. 함흥은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할 때 뿌리가 된 본향이었다. 하지만 함흥 본궁 참배는 역대 조선 국왕 그 누구도 거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황실은 사라지고 없고 황실을 대신하는 조직 ‘이왕직’과 총독부가 조율해서 나온 행사였다.

참배를 하고 제사를 올릴 때 순종은 대한제국시대 황제 복식을 착용했다. 참배용 제물(祭物)은 선박을 이용해 원산에서 함흥으로 운반했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됐지만 제사 형식은 대한제국시대 그대로였다. 총독부는 옛 권위에 대한 복종심을 적극 활용해 식민 권력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 것이다.

5월 15일 열차편으로 경성으로 복귀한 순종은 6월 8일 다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향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도쿄 참배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동상(東上)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다.

6월 8일 경성을 출발해 그 달 28일 귀경한 20박21일의 장기 여행이었다. 모든 일정은 총독부가 일본 궁내성과 함께 기획했고, 순종은 일본 황족(皇族)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일본 육군대장 정장을 입었지만 가는 곳마다 황족에 준하는 예포 21발로 환영을 받았다. 이왕직은 순종을 위해 일본 현지 숙소에 조선식 아궁이와 솥까지 마련해놓았다.(‘어동상일기(御東上日記)’ 6월 8일: 이왕무, ‘1917년 순종의 일본 행차에 나타난 행행의례 연구’,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재인용)

‘어제 이왕이 천황을 알현했다’는 1917년 6월 15일자 ‘매일신보’

9일 순종 일행은 부산에서 황족깃발을 게양한 일본 군함 히젠(肥前)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히젠함은 러일전쟁 때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이었다. 효고현 마이코(舞子)에서는 방적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 여공 120명이 나와 환영했다. 나고야에서는 동생 영친왕을 만났다. 6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순종은 다음날 오전 천황 다이쇼(大正)을 만났다. 배석했던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덕담이 오가고 이왕 전하는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곤도 시로스케, 앞책, p200)

천황 전용 제사전인 현소(賢所) 참배, 영친왕 이은이 복무중인 근위보병 2연대 방문, 메이지천황릉 참배 등등 다양한 일정을 소화하고 순종은 6월 28일 부산을 거쳐 경성으로 돌아왔다. 옛 황제의 권위와 식민 권력의 권위를 중첩시켜 식민 조선백성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거대하고 정교한 이벤트였다. 식민 본국과 총독부가 연출하고 왕공족 순종이 출연한 거대한 연극이었다.

일본 효고현 마이코(舞子) 아카시방적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공들이 순종을 환영하는 장면(6월 14일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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