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작은 공원의 나무들

양민주 시인 2022. 5.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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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최근 들어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소소한 행복이 되었다. 나이가 차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퇴직을 앞둔 사람의 마음이랄까? 이런 행복을 누리기까지 오랜 기간 교직원으로 일했다. 돌이켜 보면 처음엔 사무실이라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살다가 세월의 흐름에 잘 적응하여 여기까지 왔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을 오가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많이도 겪었다.

창밖을 바라보면 작은 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연분홍 꽃잎을 떨어뜨리고 연초록 잎이 검푸르게 변해가는 벚나무, 실바람에 연한 잎을 뒤집고 춤추는 느티나무, 늘 푸른 소나무,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워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이팝나무, 잎이 아기 손 같은 단풍나무, 군인같이 늠름해 보이는 사철나무, 아카시아 등등. 종류는 다양하지만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다.

그중 진한 향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키 큰 아카시아 두 그루는 부부처럼 나란히 서 있다. 한 나무꼭대기에는 지난해 지은 커다란 말벌 통이 달려 있지만, 겨울을 나며 벌이 떠나간 뒤라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른 한 나무에는 지난 삼일절쯤부터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우듬지에 둥지를 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주 멋진 보금자리를 꾸며놓았다. 새끼를 키우는지 부지런히 둥지 구멍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독립할 때가 된 아이들 걱정도 든다.

공원의 나무 위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 아래로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언제부터인가 고양이 한 두 마리가 공원에 들어와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학생들이나 외부 사람이 집을 마련해주고 먹이를 주면서 개체가 많이 늘어난 것 같다. 고양이들은 이제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을 가지 않는다. 학생들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고양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고양이가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개체가 더 많이 늘어나 관리가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생긴다. 가끔 청소하는 여사님이 찾아와 고양이가 강의실에 대소변을 보고 가서 청소하기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은 동전의 양면 같다. 두 마음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나무가 열매를 다는 이유는 번식을 위해서다. 하지만 나무는 사람과 새를 위해 열매를 매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늘 저 자리에 있는 나무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새파란 잎을 펼치고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땅속으로 뿌리를 뻗어가며 열심히 영양분을 찾을 것이다. 줄기를 통해 양분을 잎으로 보내고 있을 것이다. 겨울나무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겨울나무는 잎이 무성한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목(裸木)으로 추위를 꿋꿋이 참고 견뎌왔을 것이다.

나목을 그린 화가 박수근이 떠오른다. 박수근은 왜 잎도 없는 나목들을 그리 많이 그렸을까? 화가의 삶이 나목 같았던 것일까? 아니면 화가 자신이 나목이었기에 나목을 그리며 새싹처럼 돋아날 희망을 품었던 것일까? 지금 박수근은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으니 그의 희망은 이루어진 것 같다. 박완서 소설가는 박수근과 가졌던 친분을 토대로 하여 소설 ‘나목’을 썼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나목은 봄의 희망을 품은 겨울나무 박수근이었다.


창밖의 나무들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저 나무들이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너도 이젠 퇴직할 나이가 되었으니 우리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어울리자고 손짓하는 듯하다.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선생의 눈길을 피해 슬며시 일어난다. 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숲속에 나무처럼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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