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끼니] 육회비빔밥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2022. 5.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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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한번 짓고 나면 식으면서 맛과 향이 떨어지는 것이 숙명이다.

육회비빔밥은 날것으로 먹어도 될 정도로 싱싱한 쇠고기가 있어야 가능한 음식이다.

밥 육회 나물 고추장이라는 단순한 조합이지만 육회비빔밥은 지역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저 모든 육회비빔밥이 각별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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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한번 짓고 나면 식으면서 맛과 향이 떨어지는 것이 숙명이다. 이 과정을 ‘밥의 노화’라고 한다. 인간의 노화와 마찬가지로 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지금까지도 밥의 노화 역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기밥솥의 보온 기능은 말 그대로 밥의 온도를 유지해주는 기능에 그친다. 밥을 따뜻하게 유지해주지만 잃어버린 맛까지 살려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전 세계 전기밥솥 제조사의 영원한 숙제다.

나는 육회비빔밥을 맛보다 추억으로 먹는다.


우리 조상들은 노화된 밥을 살리는 두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토렴은 노화된 밥에 뜨거운 국물을 끼얹어 밥에 온기와 맛을 불어넣는 조리방식이다. 토렴을 하려면 항상 국물이 팔팔 끓고 있어야 한다. 토렴이 여의찮을 때 선택한 것이 비빔밥이다. 밥 위에 나물과 푸성귀를 올리고 참기름이나 고추장 한 숟갈을 올려서 비볐다. 불이 없어도 노화된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비빔밥은 현장의 밥이며 농민의 밥이다.

그런데 비빔밥 앞에 ‘육회’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육회비빔밥은 날것으로 먹어도 될 정도로 싱싱한 쇠고기가 있어야 가능한 음식이다. 노화된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요리다. 전주비빔밥이나 진주비빔밥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향토음식이 된 배경에는 육회의 도움이 크다. 전주와 진주 외에도 우리나라에는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동네가 더러 있다. 전라북도 익산, 전라남도 함평, 전라남도 구례 등이다. 이런 동네의 연혁을 살펴보면 가까운 곳에 어김없이 우시장이나 도축장이 있었다.

밥과 쇠고기 육회, 그리고 둘을 단단하게 엮어주는 고추장의 조합은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과 감칠맛이 증가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꼭꼭 씹게 된다. 나는 이 조합을 유난히 좋아한다. 밥 육회 나물 고추장이라는 단순한 조합이지만 육회비빔밥은 지역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맛과 풍류의 고장답게 전주는 담음새에 신경을 많이 쓴다. 오방색을 가지런히 맞추고 상차림도 어지간한 한정식 못지않다. 진주는 물기를 뺀 나물을 잘게 다져서 고명으로 올리기 때문에 씹을 때의 느낌이 좋다. 익산은 손님에게 내기 직전에 밥을 비비고 그 위에 양념한 육회를 올리기 때문에 감칠맛이 폭발한다. 함평은 밥을 비빌 때 돼지비계를 몇 점 같이 넣는다. 육회와 함께 씹히는 돼지비계가 별미다. 구례의 경우는 육회비빔밥에는 선짓국이라는 ‘국룰’을 깨고 보리새우를 우려낸 국물을 낸다. 그 국물이 육회비빔밥 못지않게 입맛을 당긴다. 지역의 환경과 지역민의 기호가 만들어낸 방식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그저 모든 육회비빔밥이 각별한 맛이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에게 육회비빔밥을 자주 먹이셨다. 어린 녀석이 육회비빔밥을 야무지게 씹어 먹는 모습을 보며,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농부마냥 흐뭇해하셨다. 육회비빔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그때 할머니의 표정이 떠오른다. 나는 그 표정을 잊지 않기 위해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동네를 지날 때면 반드시 육회비빔밥을 먹는다. 나는 세상 모든 육회비빔밥이 다 맛있다. 음식에 추억이 결합 되면 이래서 무섭다.

누군가 내게 “맛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언제나 “맛은 곧 당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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