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72>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읊은 학봉 김성일의 시

조해훈 고전인문학자 2022. 5.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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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안의 세 장사(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한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남강) 물을 가리키네.

그래서 시의 '삼장사'는 김성일·조종도·이로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삼장사인 김성일·조종도·이로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독자 한 분이 삼장사와 김성일에 대한 질문을 해 필자는 "역사는 편협적으로 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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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촉석루 안의 세 장사(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한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남강) 물을 가리키네.(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장강의 물 도도히 흘러가니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류도도)/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위 시는 퇴계 이황의 수제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분투하며 촉석루에서 읊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김성일이 시를 지을 때 현장에 함께 있었던 두 사람이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1537~1597)와 송암(松巖) 이로(李魯·1544~1598)였다고 한다. 그래서 시의 ‘삼장사’는 김성일·조종도·이로이다. 간혹 이로 대신 곽재우를 말하는 문헌 등도 있다. 진주성 동문(촉석문)과 촉석루 사이 중간쯤 ‘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비석이 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삼장사인 김성일·조종도·이로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삼장사 기록이 문헌마다 달라 국사편찬위원회 유권해석을 받아 1963년 건립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은 김성일이 일본의 조선 침입은 없을 것이라고 알려 조선을 전쟁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고 평가한다. 조선은 일본의 조선 침략 소문이 무성하자 1590년 일본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냈다. 통신사의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 김성일, 서장관은 동인 허성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돌아와 보고했는데 내용은 서로 달랐다. 황윤길·허성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 한 반면,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당시 재상이던 유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 편을 들었다. 김성일은 유성룡에게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 조정은 임란 책임을 김성일에게 돌렸다. 1592년 음력 6월 28일 조선왕조실록기록이 김성일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독자 한 분이 삼장사와 김성일에 대한 질문을 해 필자는 “역사는 편협적으로 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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