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살림의 언어 쪽에서 일할 수 있느냐가 제 시론"
선한 해학과 너른 시선으로 주목 받아와
시 60편 묶어 4년 만에 펴낸 11번째 시집
가족과 이웃, 자연과 사물, 삶과 죽음 담아
"우리는 관계의 인다라망 속에서 존재해
깜빡 숨넘어갈 때 살짝 빛이 피어나듯이
일출하고 일몰하는 것이 같은 길로 연결"
시집에는 가족과 이웃은 물론, 자연과 사물, 삶과 죽음이 한데 모여 그윽한 아름다움과 중후한 활력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다수 담겨 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얼음 속에서라도 질문이 살아 있으니 아직은 파멸이 아니다. 답은 하나”라며 “앞뒤가 아니라, 옆이다. 당신 곁”이라고 말했다.
이정록 시인은 꾸준히 발신해 온 생명과 살림 이야기를 이번 시집에선 어떻게 그렸을까. 이정록의 시 세계는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이 시인을 지난 11일 서울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시 ‘진달래꽃’은 어떻게 쓰게 된 것인지.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그럴 때가 있다.// … 촛불이 깜빡,/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그럴 때가 있다’ 부문)
―표제시는 우주의 관계성이 드러나는 어느 순간을 포착한 것 같은데.
“우리는 관계의 인다라망 속에서 존재한다. 여기에서 깜빡 숨넘어갈 때 저쪽에서는 살짝 빛이 피어나듯이, 일출하고 일몰하는 것이 같은 길이다. 고통과 기쁨 역시 딱 잘라서 특정 국가나 사회, 종교만의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이 한 개의 선으로 연결돼 있고, 그것을 단절시키거나 놓치거나 무시하거나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작은 기미와 조짐조차도 저쪽에서는 엄청난 어떤 슬픔의 기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지금 너와 내가 너무 명확하게 단절돼 있고, 배척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보고 싶었다.”
어느 날, 시인이 시골버스에 앉아 있었는데 팔순의 할머니가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무릎수술을 하고 오랜만에 나타난 할머니에게 서른이 아니냐고, ‘성장판 수술’을 한 게 아니냐고 농을 건네자, 할머니는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라고 몰아붙이는데.
“지금 시골에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운전면허를 딸 수 없는 어르신들이 장에 가거나 어디 나오려면 이동 수단은 버스밖에 없다. 승객은 아저씨들이 일찍 떠난 여성들이 대부분이고, 버스 기사는 대부분 남자다. 오십대 중후반의 남자 버스 기사와 칠십대 이상의 어르신들의 대화만으로 채우는 연작 시집을 준비 중이다.”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이나 의미는.
“지금은 시가 책으로만 읽히는 게 아니라 무대에 올려져서 시극이나 시노래 등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번 시집이 이전과 달라진 건 시극이나 시노래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시가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자기중심적 시 세계에서 좀더 대중과 현장, 무대 낭독이나 시극 등 다른 장르로 소통 교류하려고 노력했다. 국악이나 관현악의 연주 속에서 노래, 큰 북, 암전, 침묵 등 여러 생각을 하고 배치했다.”
“지금 시극 외에도 시로 쓰는 사전을 쓰고 있다. 국어사전이나 원예사전, 식물사전에 설명된 감나무는 모두 같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감나무는 다 다르다. 감나무 밑에서 연애한 사람도 있고, 감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사람도 있고. 이정록의 감나무를 쓰는 거다. 600편 정도를 쓰려고 하고, 지금 한 3분의 2 지점을 지나고 있다.”
시인은 “제 언어가 어떻게 하면 살림의 언어 쪽에서 일을 할 수 있느냐가 제 시론”이라며 오늘도 죽임의 언어가 아닌 살림의 언어를, 살림의 시를 쓰기 위해 펜을 든다. 어둠의 언어가 아니라 촛불을 건네주고 밝히고 꽃피우는 살림의 언어여야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존재에게 다시 가시로 찌르고 포탄을 쏘는 것이라면 차라리 시를 쓰지 않는 게 낫다고 다짐하면서.
그리하여 시인 이정록은 “때로는 분노나 아쉬움, 서글픔 때문에 시가 탄생한다면, 그것을 노래하는 절망과 아픔의 순간 사이사이에 어떻게 하면 살림의 언어를 박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릴 것이다. 검정 고무신을 꺾어서 자동차 놀이를 할 때 흙탕물을 채우고 소방차를 몰다가 중학교 때 저수지에서 익사한 초등학교 동창 기활이가 혹시 홍수에 떠내려가는 암소의 마른 등에 앉아 있는지 살피듯.
“흙탕물 채우고 소방차를 몰던 기활이는 저수지에 들어간 뒤 쉰 넘어까지 나오질 않는다. 시란 걸 쓰고 읽을 때마다 나는 행간에 구명조끼가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암소의 마른 등, 그 등짝에 기활이가 앉아 있는지를.”(‘구명조끼’ 부문)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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