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 자란 곳서 배우고 일하는 나라가 되면..'in 지방' 하겠습니다[기울어진 균형발전]④

김태희·강은 기자 2022. 5. 17. 21:5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하고 싶은 일과 공부를

[경향신문]

균형발전 정책 20여년 노력에도
여전히 대학 진학·취업 등 이유로
지방에서 서울로 인구 이동 계속

최정아씨(50·가명)는 1990년대 초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근 도시에서 굴지의 한 은행에 취업했다. 고교 시절 성적이 상위 5% 안에 들었고, 당시에는 은행권 취업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최씨는 수십년간 일하면서 취업시장이 변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신규 직원들은 거의 대학교 졸업이고 특히 서울 소재 대학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거점 국립대를 나오면 지역에 있는 대기업이나 은행에 어렵지 않게 들어갔지만 이제는 서울의 주요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 돼 재수, 3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그는 자녀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적극 찬성했다고 한다. “저는 지방에서 나고 쭉 살았지만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딸아이는 거점 국립대에 동시 합격했는데도 서울로 갔죠.”

김형식씨(38·가명)는 부산 토박이다. 부산의 한 국립대를 졸업하고 중견기업에 취직했다. 일자리를 구할 때만 해도 모교에 대한 인식은 꽤 괜찮았고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쩍 ‘지방 명문대’라는 인식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총무과서 일하는데 이력서를 받아보면 과거와 달리 우수한 자원을 가진 학생들이 중견기업에 지원하지 않아요. 그런 학생들은 모두 수도권으로 가거든요. 게다가 지방대의 경우 의대 등 몇몇 과를 제외하면 명문 지방 국립대였더라도 현재는 그냥 다 지방대로 인식될 뿐이고요”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한 균형발전 정책이 추진된 지 20여년이 흘렀다. 그러나 지방 거주자들은 이제 고향을 등지고 수도권으로 향한다. 지방 토박이 부모조차 자식에게 ‘고향살이’를 추천하지 않고 있다. 지방은 점점 일자리와 교육은 물론 향유할 문화 공간도, 즐길 거리도 없는 텅 빈, 활력 없는 공간이 돼버렸다.

지방이 다시 활기를 찾기 위해선 청년들이 고향에서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들의 꿈을 지켜주고 실현시켜주기 위해선 지역이 경제·문화·정치적으로 발전해 양질의 일자리와 다양한 체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신지식을 연구해 산업기술로 발전시키는 유수의 대학이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경쟁력 있는 대학 확보→산학연 클러스터를 통한 양질의 일자리 확충→지역발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구조조정은 지방대를 죽였고
수도권 규제 완화는 기업 쏠림 가속

백년지대계 무색한 ‘계획 없는’ 대학정책

한국의 대학 생태계는 기형적이다. 전체 대학 중 국·공립대는 15%에 불과하고 85%가 사립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교육지표를 보면 일본만 제외하고 대부분 나라의 국·공립대 학생 비중은 70∼90%다. 한국과는 정반대다. 이는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에서 농토나 건물 등만 있으면 대학을 인가해주는 방임적 정책을 시행해 사립대들이 우후죽순 들어섰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사립대 지방분교·개방대 설립 등까지 더해지면서 사립대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립대의 홍수 속에서 사학 재단 비리는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학령인구 감소까지 겹치면서 지방에선 스러져가는 사립대들이 속출하고 있다.

결국 참여정부 때인 2004년 대학 구조조정에 나서 지원금을 통해 사립대의 자율적 통폐합을 유도하고 국립대는 학부 정원의 15%를 감축하도록 했다. 이명박 정부도 평가 하위 15%에 속한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고 퇴출을 유도했다. 박근혜 정부도 이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학 구조조정 이후 지방대 위기는 심화됐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3만6100여명의 입학정원을 감축했는데 지방대에서 2만8400명(78.5%)이 줄었다. 박근혜 정부(2013~2017년) 시절 대입정원은 6만1000명 감축됐는데 전체 감축 인원의 76%인 4만6000명이 지방대에서 줄었다.

문재인 정부서 기존 ‘대학구조개혁평가’ 명칭을 ‘대학기본역량 진단’으로 바꾸고 평가 항목과 기준을 개선했지만, 여전히 정책의 본질은 지방대 폐교와 인원 감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는 “해방 후 한국 대학정책은 무분별한 확장만 있었을 뿐 계획이 전혀 없는 ‘완벽한 엉망진창’ 상태”라며 “역대 정권들의 균형발전 정책들이 실패한 것은 지역에 세계적인 대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윤석열 정부가 제아무리 지역발전을 외쳐도 세계적인 대학이 없다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구도 고도화·산학연 연계 등
양질의 교육·일자리 환경 갖춰져야
한국 어디에 살아도 잘 살 수 있어

연구중심 대학이 지역을 살린다

전문가들은 지방이 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거점 국립대를 중심으로 ‘지방대 살리기’부터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2003년 정진상 경상대 교수는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방안을 제안했다. 서울대를 포함한 전국의 국·공립대와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립대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방안이다. 학계와 정치계에서 반응이 뜨거웠으나 제대로 실현되진 못했다.

최근 김종영 교수가 내놓은 ‘서울대 10개 만들기’ 방안도 주목을 받고 있다. 강원대·경북대·경상대·부산대·전남대·전북대·제주대·충남대·충북대 등 9개 거점 국립대 위상을 서울대 수준까지 끌어올리자는 게 핵심이다.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와 방향은 비슷하나 서울대만큼의 정부 예산 투입과 연구중심 대학 육성을 강조한 부분이 큰 차이점이다.

김 교수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산업적으로 뜨는 곳이 텍사스인데, 교통도 안 좋은 이곳에 반도체·컴퓨터 클러스터가 자리 잡은 배경에는 ‘퍼블릭 아이비’(아이비리그 수준에 버금가는 명문 주립대를 일컫는 말)로 불리는 오스틴대학이 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이 20세기 이후 독일을 제치고 세계경제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연구중심 대학을 전국 곳곳에 만들고 대대적인 지원을 한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대학이 교육기관을 넘어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고 산업의 흐름을 바꾸는 창조권력이 된 만큼 한국도 대학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도 돈이 있어야 좋은 교수와 인재가 몰린다. 반면 지방대학의 재정구조는 심각한 왜곡 상태다. 대학알리미 공시자료를 보면, 지난해 서울대 학생 1인당 교육비는 4861만원으로 거점 국립대 9곳 평균인 1851만원의 2.6배에 달한다. 서울의 9개 주요 사립대 평균 교육비(2149만원)도 거점 국립대보다 300만원가량 높다.

김영록 강원대 교수는 공공성이 담보돼야 할 국립대가 사립대보다 정부 재원 투입이 적다는 모순을 지적했다. “지역 국립대는 점점 소외되는데도 정부는 서울 사립대에만 지나칠 정도로 지원을 많이 해요. 제 자식도 못 챙기면서 남의 자식 챙기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2020년 대학재정지원사업 현황을 보면 서울대가 5928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연세대 4196억원, 고려대 3414억원 순이었다. 교육부는 거점 국립대를 살리기 위해 2018년 800억원이던 예산을 확대해 2019년부터 매년 1500억원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수도권과의 격차를 줄이려면 이 정도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를 개편해 지방대학 육성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란 국가가 지방자치단체 교육행정을 지원하는 돈인데, 여기에는 유치원과 초·중등 교육만 포함된다. 김영록 교수는 “출생아 수가 100만명을 넘었을 때 만든 제도를 아이들이 4분의 1로 줄어든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나눠 쓰기보다는 고등교육특별세를 새로 만들어 거점 국립대에 투자하고, 연구·개발(R&D) 비중을 높여 대학별 산업 클러스트를 형성해야 한다는 대안도 나오고 있는 만큼 정부와 정치권의 대안 마련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지방 사립대를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가를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사립대에 대해선 등록금을 자율화해 시장 경쟁을 시키는 한편 그 재원으로는 국립대에 더 투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태훈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재원 마련은 정부 의지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 해 우리나라 시민들이 지출하는 사교육비가 20조원을 넘는다”며 “정부가 5조~10조원을 투자해서 대학 서열화 문제를 완화하고 대학의 질을 높인다면 오히려 국가적인 이익”이라고 말했다.

IMF 이후 왜곡된 지방 일자리 지형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지방에서도 취업이 잘됐어요. 보너스도 두 달에 한 번씩 600% 받았고, 명절 보너스는 별도로 받았어요. 그런데 외환위기 때부터 한 10여년간 급여가 제자리걸음을 하더니 그 이후는 올라도 크게 오르지 않으면서 수도권 기업들과 큰 차이가 나더군요.”

경북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의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민재식씨(55·가명)의 말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거치면서 지방과 수도권의 일자리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틀린 지적이 아니다.

IMF 사태 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정부는 국제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수도권 규제를 완화했다. 이명박 정부는 수도권 산업단지 내 공장의 신·증설을 전면 허용하고, 기업 R&D 센터의 설립까지 지원했다. 문재인 정부도 리쇼어링(해외공장의 국내 복귀) 정책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활성화를 목표로 수도권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수도권에는 전체 일자리의 54%가 몰려 있다. 100대 기업 본사의 91%는 서울에 있다. 정보통신기술(ICT)·바이오·의료 등 새로운 일자리는 수도권에서만 생겨난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벤처 스타트업 일자리 동향’에 따르면 2020년 코로나19로 고용 상황은 악화됐지만 벤처투자를 받은 기업의 고용증가율은 전년보다 30.9% 늘었다. 특히 전체 고용증가의 82%가 수도권에 집중됐다.

반면 역대 정부는 지방에 일자리를 늘린다는 약속과 달리 오히려 기업들의 수도권 진출을 돕는 엇박자를 연출했다.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그간 비수도권에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대부분 공모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탓에 성과 위주, 단기성 사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사업 간 연계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방에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지방의 산업구조 고도화가 먼저라고 말한다.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가는 이유는 첨단산업과 ICT 등 선호하는 일자리들이 지방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민원 광주대 교수는 나주혁신도시에 추진 중인 ‘한전공대 에너지산업 클러스터’가 지방 일자리 정책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전공대는 단순 교육기관이 아니라 에너지 분야의 역량을 한데 모아 ‘에너지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핵심 기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한전공대가 세계 최고의 에너지 전문가를 모셔 와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이 전문가들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다시 에너지 밸리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을 키워낸다면 자연스럽게 지역 균형발전의 선도 지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전공대의 연구성과를 전남대·조선대 등 인근 대학들과 공유해 네트워크화하면 일자리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용창 경남대 교수는 첨단기업들의 지방행을 유도하려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법인세에 차등을 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통해 지방에 있는 기업들에 대한 법인세율을 수도권 기업들과 달리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청년들의 지역 유출을 막기 위해선 일자리 구조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지방에선 남성 중심의 제조업 위주라서 여성들이 지방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김유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수도권은 산업구조가 서비스·ICT 중심이어서 여성들의 선호도가 높다”며 “남녀가 차별 없이 일하려면 지방의 제조업 공정을 고도화하고 이 과정에서 ICT 기반의 다양한 서비스업을 창출하면 일자리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리즈 끝>

김태희·강은 기자 kth08@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