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정은경의 뒷모습
[경향신문]
자신들에게 헌신한 이를 위해 옛사람들은 비석을 세웠다. 큰 돌을 정성스레 다듬어 천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도록 그의 공과 덕을 깊게 새겼다. 아예 쇠로 만들기도 했다. 그 공덕비·선정비에는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불망(不忘)이란 글자를 넣는다. 가짜 불망비도 많지만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결국 깨지거나 땅에 묻힌다. 불망비의 무게는 그렇게 무겁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코로나19 사태 속에 국내외적으로 K방역 상징이던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17일 물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백경란 성균관대 교수를 질병관리청장에 임명하면서다. 정 청장은 이날 각 부서를 돌며 직원들을 만난 뒤 조용히 떠났다. 바이러스와의 ‘총성 없는 전쟁’에서 질병관리청장으로 1년8개월, 질병관리본부장직까지 합하면 4년10개월 만이다. 방역 최전선을 지킨 그의 헌신은 국내에선 ‘국민영웅’, 해외에선 ‘바이러스 헌터’라 불릴 만했다. 염색할 시간조차 아끼느라 하루가 다르게 희끗희끗해지는 머리카락, 까칠해지는 그의 얼굴을 국민 모두가 지켜봤다. 수면시간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시간보다는 더 잔다”고 했다. 모두를 짠하게 한 그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던 시기, 노란 점퍼를 입고 차분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브리핑하던 그는 신뢰의 상징이 됐다. 영국 BBC방송과 미국 타임지 등은 2020년 그를 ‘올해의 여성 100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등으로 선정했다. ‘일관되고 솔직한 언급’ ‘과학적 정보에 근거한 전문가로서의 분석’ ‘인내심 있는 침착함’ ‘투명한 정보공개’ 등이 리더십 특징으로 꼽힌다. 정 청장은 이날 마지막으로 출석한 국회에서 “과학방역을 해왔다”며 ‘정치방역’이라 비판해온 정치권에 일침을 놨다. 그는 “백신·치료제 등은 과학적 근거로 정책을 추진하고, 거리 두기 등은 사회적 합의나 정치적 판단이 들어가는 정책이므로 그걸(과학방역과 정치방역을) 구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이 이날 온라인에서 그를 찾았다.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안타깝고 고마운 마음들이 진하게 묻어났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는 마음의 공덕비·불망비를 필자도 하나 세워본다.
도재기 논설위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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