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의 재능은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최재봉 2022. 5. 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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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탐문]최재봉의 탐문_15 우정 혹은 경쟁

"우리 자신과 재능 있는 타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 질수록 왜 고통은 더 커지는가. 우리가 아는 이들, 우리와 같은 나이이거나 젊은 사람들, 우리와 같은 나이이며 친구인 이들,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와 삶을 함께하는 누군가의 재능은 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은 화가 폴 세잔과 소설가 에밀 졸라의 우정을 다룬 영화다.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의 중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둘은 청년이 되어 파리로 올라와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각자의 예술혼을 불태운다. 30년 넘게 이어지던 둘의 우정은 그러나 졸라가 1886년에 발표한 소설 <작품>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게 금이 간다. 이 자전적인 작품에는 화가 클로드와 소설가 상도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각 세잔과 졸라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 문제는 소설에 묘사된 클로드가 결국 화단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는 사실. 소설에서 자신을 괴팍하다 못해 광기 어린 실패자로 그린 졸라에게 세잔은 분개했고 결국 친구 관계를 청산하기에 이른다.

영어 신조어 ‘프레너미’(frenemy)는 세잔과 졸라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맞춤해 보인다. 친구(friend)와 적(enemy)을 합한 이 말에는 예술가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경쟁, 애증이 엇갈린 미묘한 관계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는 듯하다.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면 두 친구의 결별이 반드시 <작품>이라는 소설 때문만은 아니고 예술가들 사이의 우정에 내재한 필연적 귀결일 수 있다는 암시가 곳곳에 보인다. “오랫동안 젊은 날을 한 형제처럼 지낸 친구들이 갑자기 낯설고 적이 되는 놀라운 순간” 같은 구절은 흡사 ‘프레너미’에 대한 풀이처럼 다가온다. 게다가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아래 인용문은 아예 <작품> 출간 이후 세잔과 졸라의 관계 파탄을 예고하는 것 같지 않겠나.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고, 그들은 저마다 굶주린 늑대같이 서로 물어뜯었다. 그들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고, 균열이 점점 커져서 오랜 영원을 맹세하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 우정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들 사이의 우정이 가능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사에는 작가들 사이의 애틋하고 끈끈한 우정을 보여주는 일화가 차고 넘친다. 청록파 동료로 ‘완화삼’과 ‘나그네’라는 명시를 주고받은 조지훈과 박목월,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단편소설 ‘사평역’으로 변주한 동향의 동갑내기 소설가 임철우, 결핵균을 앞세워 시시각각 조여 오는 사신(死神)에 맞서고자 친구 안회남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 번역 일거리 주선을 호소했던 김유정, 그리고 사반세기 전 아깝게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의 기일을 꼬박꼬박 챙기며 해마다 그의 묘소를 찾는 동갑내기 평론가 정홍수…. 이런 사례들 앞에서 삼가 옷깃을 여미지 않기란 불가능하리라.

“20여년간 그와 사귀어오면서, 아니 그와 술을 마셔오면서 내가 언제나 그의 의견에 승복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와 여러번 다퉜고 그 다툼은 때로는 절교 상태로까지 우리의 관계를 몰고 갔다. 그때마다 그는 작품으로써 다시 그의 의견을 나에게 되물었다.”

김현의 평론집 <문학과 유토피아>에 실린 이청준론 중 한 대목이다. 이청준과 김현은 ‘68문학’ 동인이었으며 이 동인이 창간호를 내고 해체된 뒤에는 계간 <문학과지성>과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매개로 삼아 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이들처럼 비슷한 나이대에 문학적 지향도 통하는 문인들은 흔히 동인으로 뭉쳐서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고는 한다. 반드시 동인을 꾸리지 않더라도 같은 세대끼리는 암암리에 인정과 평가를 주고받으며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인들 사이의 관계가 반드시 아름답고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박인환과 동인을 같이했으면서도 그의 사후에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며 막말을 퍼붓다시피 한 김수영의 경우를 보라.

19세기 후반 영국 문단의 풍속도를 그린 조지 기싱의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를 참조해보면, 문인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사뭇 보편적이기까지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에서 낙백한 원로 비평가 앨프리드는 딸 메리언에게 이렇게 하소연한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가? 성공한 자들, 나를 짓밟으려 하는 그들보다 내가 열등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보다 뛰어난 지성과 고귀한 영혼을 지녔다!” 메리언 역시 아버지를 좇아 문필업에 뛰어드는데, 그가 보기에 아버지는 “문단에서 생긴 원한의 혐오스러운 정신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다른 업종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업종에서처럼 질투와 증오와 악의가 넘쳐흐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메리언이 말할 정도다. “내가 듣고 읽는 것들 때문에 문학 자체가 싫어지곤 한다”는 데에 이르면 문학의 감추어진 맨얼굴을 엿본 듯한 당혹감마저 맛보게 된다.

문학 동료들 사이 애증의 드라마 중에서도 부부 또는 연인 사이의 그것은 유독 극적이고 파괴적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쓴 소설 <왈츠는 나와 함께>의 소설 원고를 남편의 편집자인 맥스웰 퍼킨스에게 보냈고, 퍼킨스를 통해 원고를 확인한 스콧은 이 작품이 자신의 첫 소설 <낙원의 이쪽>에 나오는 인물을 표절했으며 그 무렵 그가 쓰고 있던 소설 <밤은 부드러워>와 소재 및 구성이 흡사하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젤다는 거꾸로 남편이 자신의 말과 글을 그의 소설에 제멋대로 가져다 썼다고 폭로했다. 젤다를 그저 문제투성이 뮤즈 정도로 치부하던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 부부의 관계를 새롭게 보는 논의가 이제는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열여덟살 어린 나이에 당시 쉰세살이던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와 1년간 동거하다가 버림받은 작가 조이스 메이너드는 그로부터 25년 뒤에 낸 회고록 <호밀밭 파수꾼을 떠나며>에서 은둔의 작가 샐린저와의 관계를 포함한 자신의 지난 삶을 공개해 논란을 낳았다. 필립 로스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영국 배우 클레어 블룸도 회고록 <인형의 집을 떠나며>에서 로스와 꾸렸던 결혼생활의 치부를 드러냈고, 로스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라는 소설에 블룸을 모델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복수’했다.

전미도서상을 받은 <인생수정>을 비롯해 <자유> <크로스로드> 같은 소설이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작가 조너선 프랜즌. 그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캐스린 체트코비치가 2003년에 발표한 에세이 ‘질투’는 작가 커플 사이의 내밀한 관계와 심리를 진솔하게 묘사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것은 두 작가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하자면, 질투에 관한 이야기. 나는 그 남자를 어떤 예술가촌에서 만났고, 그가 들려준 첫 이야기에서부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글에서는 남성 작가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프랜즌이라는 사실은 문단 사정에 조금이라도 밝은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둘은 예술가촌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는데, 남자의 글이 자신의 글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이 여자를 괴롭혔다. “여기 내가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한 문장과 문단, 페이지들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어느 날은 남자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애를 먹고 있는 원고를 읽어봐 주기를 부탁한다. “나는 그 역시 좋은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크게 안도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본 남자의 글은 생각과는 달랐다. “이해가 안 돼. 정말 좋은데.” 여자의 이런 말을 듣고 남자는 비로소 안심하며 고마움을 표하지만, 여자는 내심 실망하고 다시 좌절한다.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충동이 사라져 버렸다.”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발생했을 때는 남자의 책이 나온 지 불과 일주일 정도 된 시점이었다. 테러 소식을 듣고서 여자에게 우선 든 생각은 “남자의 책이 지워질 거라는 거였고, 그러자 안심이 되었다.” 둘의 관계는 결국 이별로 마무리되는데, 이 글 속에서 체트코비치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정과 경쟁이 뒤섞인 작가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 생각할 바를 던져준다.

“우리 자신과 재능 있는 타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 질수록 왜 고통은 더 커지는가. 우리가 아는 이들, 우리와 같은 나이이거나 젊은 사람들, 우리와 같은 나이이며 친구인 이들,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와 삶을 함께하는 누군가의 재능은 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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