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은 "의미 있는 일 몰두하면..마지막에 대중의 사랑 찾아와"[인터뷰]
[경향신문]
잊혀진 여성감독 발자취 따라가는
영화 ‘오마주’로 첫 장편영화 주연
보이지 않는 물 속에서 물장구 치듯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 돕고 싶어
배우 이정은에게 <기생충>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졌을까.
“청년기에는 ‘돈은 안 되는데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보냈던 것 같아요. 의미가 너무 커서 돈 안 되는 걸 잊을 수 있었죠. 그것 때문에 동료들과 얼마나 설전을 벌이건, 무대에 올라가건 말건, 관객이 몇 명이 들건…. 온전히 몰두할 일이 있다는 게 흥분되고 그 덕에 버틸 수 있었어요. 나이가 먹고 부모님께 생활비도 드려야 하는 때가 되니까 ‘이대로 가야 하나’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영화 <기생충> 이후 의미 있고 돈도 되는 일들이 생긴 셈이죠.”
1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은은 이렇게 설명했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오마주>에서 연기한 여성 감독 지완이 극 중 “돈 되고 의미 없는 일 없냐?”고 후배에게 묻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최근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활약하는 그는 인기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을 잇달아 맡으며 승승장구 중이다. <오마주>에서는 장편영화로는 처음 단독 주연을 맡았다.
작품을 고를 수 있는 폭이 넓어졌지만 이정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작품 때문에 알게 된 점쟁이 할아버지가 ‘롤스로이스 타고 어디 갔다가도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게 삶’이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다”며 “<기생충>이나 <우리들의 블루스>로 주목받고 있다고 해도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협업으로 얻은 명예라는 걸 알았다. 그런 작품만 계속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잠깐 롤스로이스를 탄 듯한 기분을 느끼다가도 작품을 위해 ‘지하철을 타듯이’ 답사하고 연구하는 것의 반복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작은 영화, 큰 영화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잘 만드는 데 집중해왔다. 대중의 사랑은 가장 마지막에 온다고 여기고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최근 블록버스터 영화 출연 제안도 고사했다는 그는 “좋은 역할이라도 더 잘할 수 있는 연기자가 있다 싶으면 하지 않고, 이 얘기는 같이 한번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싶으면 한다”며 “독립영화라서, 예술성이 뛰어나서 작업을 한다기보단 원래 소소한 서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작품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나도 그 작품을 필요로 하니까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이가 50에 들어서니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들이 보인다. <오마주>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님은 그런 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데 관심이 많으신 것 같다”며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전했다.
<오마주>는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여성 감독 지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1세대 여성 감독의 필름을 복원하면서 겪는 여정을 담았다. 이정은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내이자 엄마인 지완을 연기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주변의 배우 동료들을 보면 아무리 각광받는다 해도 ‘아들 밥도 안 챙기느냐’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있다”며 “가족이 있는 영화인들의 어려움을 간접 체험해왔다. 신수원 감독님도 개봉이 코앞인데 시댁에 행사가 있다고 멀리 다녀오셨다”고 말했다. 꿈 많고 강단 있는 감독인 지완은 현장을 다니면서도 아들과 남편의 밥을 챙기고, 시어머니가 집에 온다는 날이면 냉장고를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정은은 꿈 때문에 갈등하는 지완을 현실적으로 풀어내면서도 유쾌함을 담아 연기했다.
극중 지완은 1960년대 영화를 만들었던 홍은원 감독의 영화를 복원하기 위해 잘려나간 필름을 찾아다닌다. 결국 찾아낸 필름은 모두 이어붙여도 몇 분이 되지 않는다. 이정은은 그때 “그래도 찾았잖아요”라고 말하는 지완의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버려질 수 있는 사람의 작업을 찾아냈다는 게 뭉클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조명받고 수면 위에 올라와 있을 때가 돼서야 그의 꿈과 이상에 대해 존중하는 것 같아요. 수면 밑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얼마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지 잘 못 보는 거죠.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그런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거든요. 이제 어떤 자리에 가면 말이 없는데 골몰하는 친구들이 먼저 눈에 들어와요. 수면 아래서 계속 물장구를 치면서 작품 만들 생각으로 눈을 반짝이는, 빛을 내게 해 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요. <오마주>에서는 유령이 된 홍 감독이 그런 존재인데, 현실에서는 이왕이면 살아 있을 때 그 빛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그런 선배가 되고 싶어요.”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나도 부정선거라 생각했었다”···현장 보고 신뢰 회복한 사람들
- 국힘 박상수 “나경원 뭐가 무서웠나···시위대 예의 있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 늙으면 왜, ‘참견쟁이’가 될까
- 공영방송 장악을 위한 이사장 해임 “모두 이유 없다”…권태선·남영진 해임무효 판결문 살펴
- 내란의 밤, 숨겨진 진실의 퍼즐 맞춰라
- ‘우리 동네 광장’을 지킨 딸들
- 대통령이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사과해요, 나한테
-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에 차량 돌진…70명 사상
- [설명할경향]검찰이 경찰을 압수수색?···국조본·특수단·공조본·특수본이 다 뭔데?
- 경찰, 경기 안산 점집서 ‘비상계엄 모의’ 혐의 노상원 수첩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