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파' 민주당과 설명의 의무

한겨레 2022. 5. 17. 18: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17일 국회 앞에서 지방선거 전 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임재성 |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과반 의석을 갖지 않으면 국회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2016년 3월 더불어민주당은 세계 의회사에서 가장 긴 필리버스터를 이어갔지만, 당시 새누리당이 밀어붙이는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대 총선이 코앞이었던 시점, 연단에 선 박영선 의원은 선거를 위해선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호소했다. “내 아들딸이 감시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 더불어민주당에 힘을 주시고 야당을 키워주셔야 합니다.”

직후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제1당이 되었다.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은 “여소야대가 되었으니 해야 할 일”로 ‘테러방지법 폐지’를 꼽았다. 했을까? 민주당은 4년 동안 테러방지법 폐지안을 발의조차 하지 않았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개헌 빼고 다 할 수 있다는 180석을 얻었다. 그들이 목숨 걸고 막겠다던 테러방지법은 지금도 그대로다. 민주당이 개정안을 하나 발의하긴 했다. ‘고의로 감염병에 대한 검사와 치료 등을 거부하는 행위’를 ‘테러’에 추가하는 개정안이다. 폐지해도 모자랄 법률을 강화하겠다는 것. “4년 만의 자기부정”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지금 의석만으로 국정원 민간인 사찰을 막을 수 없다’며 의석을 달라 외치던 민주당이 다수당이 된 지 6년이 지났다. 국회의원 10명만 모으면 폐지안을 발의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시늉조차 없었다는 얘기다. ‘박근혜 국정원에서는 악법이 문재인 국정원에서는 아닌 게 되나?’와 같이 달라진 입장은 그 자체로도 비판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입장 변화와 관련해 지금껏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다수파의 무책임이다.

소수당일 때는 ‘의석이 모자라서’라고 할 수 있다. 다수당일 때는 다르다. 입법을 하든지, 입법을 할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정치적 책임은 설명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지금 어떠한 상황인식과 정책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기에 입법을 하지 않는지 공개적, 공식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권력의 설명 위에서 구체적 지지도, 근거 있는 비판도 가능해진다. 다수자가 할 수 있는 최악에는 폭주와 함께 침묵도 포함된다.

민주당이 침묵하는 또 다른 하나가 차별금지법이다. 필자는 차별금지법 입법을 지지한다. 지금 국회 앞에서 40일 가까이 차별금지법 입법을 위해 단식하고 있는 두 활동가의 건강이, 생명이 걱정된다. 하지만 냉정하게, 누군가 단식을 한다고 모든 입법이 이뤄질 수는 없다. 정당으로서는 우선순위가 있을 수도 있고, 눈앞의 선거가 중요할 수도 있다. 밥그릇이 달린 문제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책임 있는 설명은 해야 한다. 왜 차별금지법 제정을 애원하는 10만명의 국민동의청원을 민주당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회 법사위에서 2024년 5월29일, 즉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만장일치로 미뤘는지. ‘검찰 수사권 분리 법안’은 발의 보름 안에 국무회의 의결까지 마치면서, 왜 차별금지법은 공청회 등을 핑계로 상임위원회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고 있는지. 사회적 합의 운운하지만 여론조사 때마다 과반의 지지가 확인되는 법안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떤가. 몇차례 차별금지법을 입법하겠다 밝혔지만, 시간을 끄는 진짜 이유를. 성소수자를, 이슬람을 혐오하는 일부 종교세력의 조직적 반대가 부담스럽고, 당장의 선거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된다고. 검찰정책이야 얻는 표가 분명하지만 인권정책은 잃는 표가 더 확실해 보인다고. 일하는 이들이 직장에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차별금지법 규정에 재계의 반대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테러방지법을 막겠다며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던 그들이 ‘인권 대신 표’라고 선언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럴 것이라 믿는다. 입법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당당히 말할 수 없다면 입법을 하는 게 맞다.

“국민 여러분께서 과반 의석을 주시면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며 민주당은 이렇게 호소했다. 표를 달라. 다수당이 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결단해달라. 차별금지법이 있는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달라.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