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인플레이션 시대의 노동과 노동의 가치

한겨레 2022. 5. 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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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기업의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는 높지만,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부자연스럽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자신이 파는 것의 가격을 올리는 똑같은 일을 두고, 사회적 반응은 이렇게 대조적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늘 봄이 온 듯 만 듯 한 독일의 5월은 뜨겁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정치가 잔뜩 꼬였고, 수십년 동안 철벽 수비를 보여주었던 물가가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무한대의 이해와 상생이 요구됐던 코로나바이러스의 혹한이 끝나고 봄이 왔다기에 본격적으로 일터로 돌아간 노동자들은 어이없고 답답하다. 기업 실적이 좋아 이윤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지난달에 물가가 무려 8% 가까이 올랐다는 발표가 나왔다.

첫 목소리는 독일 금속노조에서 나왔다. 임금을 8.2%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조합원이 10만명이 채 되지 않지만, 이 노조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임금협상의 체온계 역할을 해왔다. 반응은 격렬했다. 그렇게 임금을 올리면 물가가 오르고, 그러면 또 임금을 올리는 악순환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의 위험을 경고한 것인데, 친기업 성향 정당 소속 경제장관이 특히 목소리를 높였다. 임금을 올리지 말고 보너스처럼 일시불로 지원하는 게 좋다는 훈수도 보탰다.

이래저래 협상은 쉽지 않을 듯하다. 노조는 이런 경고를 근거 없는 ‘협박’이라고 본다. 노동자도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다는 경고를 되돌려 보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자들 사정은 여전히 내리막길이다. 일자리가 회복되고, 심지어 미국에서는 ‘대량 퇴직’(great resignation)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하다지만, 노동자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경제가 크게 호전됐다는 선진국의 경우 지난해 월급봉투는 5% 정도 두꺼워졌지만, 물가 상승폭도 커 실질임금은 겨우 1.6% 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과 비교해봐도, 실질임금 증가폭은 크게 낮아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럽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한때 잠잠했던 최저임금 논의도 뜨겁다. 최소 20% 이상 인상을 요구하고 있고, 네덜란드 노조는 무려 40%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5% 남짓한 요구로도 시끌벅적했던 몇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인상 요구안이다. 임금 인상률을 물가 상승률에 자동으로 연계되도록 해둔 몇몇 나라들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물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통화정책도 걱정이다. 물가를 잡겠다고 이자율을 올리면 실물경제가 냉각돼 고용의 빙하기가 올 수 있다.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을 걱정하는 논리의 일부다. 게다가 지금 통화정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런 악순환적 상황의 교과서적인 현실인 1970~80년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숫자의 세계에서 결정을 내린다고 하겠지만, 기억의 힘을 무시하기 힘들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스무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스무살에 프랑스 혁명을 경험했던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사안인 만큼 생각과 판단도 제각각일 것이다. 경제적이지만 정치적인 사안이기도 하다. 몇가지만 따져보기로 한다.

우선, 다소 근본적인 문제다. 생산 단가가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기업들은 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한다. 석유값이 오르면 주유소에서는 일제히 기름값을 올린다. 소비자로서 개인적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 ‘자연스러운 경제행위’로 받아들인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물가 인상으로 생활비가 늘어나면 이에 따라 임금을 올리려고 한다. 임금이란 생산성 향상에 따른 보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가 육체적·정신적 생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도 ‘자연스러운 경제행위’다. 그런데 기업의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는 높지만,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부자연스럽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자신이 파는 것의 가격을 올리는 똑같은 일을 두고, 사회적 반응은 이렇게 대조적이다.

둘째,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이 실현되려면, 물가만큼 임금이 빨리 올라야 한다. 그런데 물가는 시장의 신속한 반응에 따라 올라가지만, 임금은 올리려면 노동자의 수고스러운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노동자의 협상력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과 유럽이 1970년대 인플레이션으로 애먹고 있을 때 노조 조직률은 역사상 최정점에 달했다. 대부분 40%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현재 노조 조직률은 반 토막 난 상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평균이 15% 남짓이다. ‘악순환적’ 상황을 만들기에는 노동자의 조직적 힘이 전체적으로 너무 허약하다.

셋째, 기업 쪽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다. 코로나 위기 이전에도 임금은 노동생산성 상승을 따라잡지 못해 ‘임금 불황’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전반적인 불평등 증대도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했다. 물론 모든 기업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업 전체적으로 보면 기업 내부의 ‘재분배’를 통해 임금 인상분을 내부적으로 흡수할 여력이 있다. 임금이 올랐다고 소비자에게 모두 떠넘기지 않아도 된다. 임금이 상승해도 물가가 많이 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그동안 기업의 시장지배력은 커졌다. 흔히 경제학자들이 마크업(markup)이라고 하는 기업의 ‘이윤’은 지난 40년 동안 40% 이상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코로나 위기 때 더 심해졌다. 지난달 발표된 어느 연구에 따르면, 보통 미국 물가 상승 요인의 60% 정도가 노동비용이었다면, 코로나 기간에는 그 비율이 10%도 되지 않았다. 물가 상승의 50% 이상이 기업 이윤 증가 때문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10%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노동자의 협상력은 약화되고, 기업의 가격 지배력은 강화됐다.

마지막으로 임금 결정권자의 ‘폭주’다. 기업 최고경영자는 직원 월급을 정하면서 사실상 자신의 월급까지 정한다. 직원들에게는 야박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최고경영자 급여가 직원들 평균 급여보다 많아야 20~30배였는데, 지금은 보통 300배를 넘는다. 최고경영자 급여 인상률은 매년 두자릿수이고, 직원 급여 인상률은 늘 한자릿수에 머문다. 시장의 합리성을 반영한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

불투명한 것들 투성이라서 앞을 내다보는 일은 어렵지만, 임금 인상이 물가 대란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작다.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왔지만, 이는 임금 탓이 아니다. 오히려 인플레이션 때문에 힘들게 번 돈의 구매력이 떨어질 위험이 더 크다. 그러니 낮은 가능성을 옛 기억에 기대어 높이 평가한 뒤,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한 정책을 펼치는 일은 없기 바란다. 삶의 개선이 힘들다면, 지금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해주는 게 전세계적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좋다고 하는 ‘포용경제’의 첫걸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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