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발표 해놓고"..'부성 우선주의 폐기' 말 바꾼 법무부에 분통
"관련 부처끼리 협의해 대국민 발표한 사안"
“제 주위에는 부성 우선주의 원칙이 폐기되길 기다리며 혼인신고를 미루고 있는 커플도 있고요. 한 아기 엄마는 집에서는 아빠 성 대신 엄마 성으로 부르며 법 개정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도 해요. 변하지 않는 제도 때문에 국민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딸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준 이수연씨)
법무부가 부성 우선주의 폐기 방침을 사실상 중단했다는 소식(<한겨레> 5월11일치 1면)이 전해지자 ‘엄마 성’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던 시민들의 항의가 터져 나오고 있다. 부성 우선주의 원칙을 명시한 민법 781조 1항은 “자녀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라고 규정한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를 할 때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다. 혼인신고를 할 때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했는가?’라는 별도조항에 ‘예’라고 기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려면,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부가 이혼 후 다시 혼인신고를 하거나, 법원에 성본 변경 허가를 청구해야 한다. 이 제도를 두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성을 혼인신고 시점에 결정하도록 하고, 별도 신청이 없으면 아버지 성을 기본적으로 따르게 하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으나, 현재 법 개정 시도는 사실상 멈춘 상태다. “국민적 합의가 더 필요하다”(법무부),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다”(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이유에서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엄마 성 물려주기를 이미 실현했거나, 실현하길 고대하는 부모들은 정부가 밝힌 법 개정 중단 사유를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현행법의 ‘독소 조항’을 미리 파악해 혼인신고를 자녀 출생 시점까지 늦춘 뒤, 엄마 성을 물려준 이수연(41)씨는 “부성 우선주의 폐기는 관련 부처끼리 합의해 공식 발표까지 한 사안”이라며 “법무부가 일을 진행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국민적 합의’를 운운하면서, 법무부는 자체적으로 토론회, 공청회 한 번 열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며 “엄마 성을 물려준다고 해서 상속 문제나 법적 관계가 바뀌는 일도 아닌 만큼 사회적 혼란에 대한 우려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해 성·본 변경 청구 소송을 통해 자녀에게 엄마 성을 물려준 김지예·정민구 부부는 “부성 우선주의 폐기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일이 아니라, 해소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남편 정씨는 “부성 우선주의는 성평등을 저해하고,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시대착오적인 원칙이다.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아내 김씨는 “지난해 우리 가족 사례가 보도되자 지인들로부터 ‘왜 아빠 성이 고정값이어야 하느냐’, ‘몰라서 (엄마 성을) 물려주지 못했다. 억울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연락이 끊이질 않았다. 엄마 성을 물려주고 싶어 변호사 상담까지 했지만 재혼 가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포기하신 분이 기사를 보고 상담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부부가 합의해서 엄마 성을 물려주는 일이 이렇게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현 제도는 괴로움만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부성 우선주의 폐지에 유보적인 입장을 밝히며 든 ‘사회 변화에 대한 우려’를 두고서도 김씨는 “사회적 변화는 이미 이뤄지고 있다. 지금은 제도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윤다미(33)씨도 시대착오적인 해당 법 조항이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혼인신고 시점에 ‘모의 성·본 협의’ 조항에 미처 체크하지 못한 윤씨는 일단 남편의 성을 아이에게 물려준 상태다. 윤씨는 “결혼한 커플은 모두 아이를 낳는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혼인신고서에 해당 조항이 포함된 것일 텐데, 이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시대가 이미 오지 않았는가. 커플끼리 ‘성·본 물려주기’에 대한 고민과 결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전세자금대출 같은 각종 혜택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혼인신고를 하고, 나중에 (자녀 성을) 정정하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다. 혼인신고-출생신고의 선후 관계를 꼬아놓은 제도가 불합리한 상황을 양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 아빠 성 따르는 ‘부성 주의’ 폐지한다더니…1년 만에 뒤집혔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042235.html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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