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월 5월18일, 또다른 5·18 항쟁

한겨레 2022. 5. 17. 05: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2011년 5월18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직장 폐쇄".

직장폐쇄 뒤 용역깡패들이 공장문을 걸어 잠그고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몰아붙였으며, 10년간 이어진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고난의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순하게 유성기업 노동자들만의 투쟁일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온전한 노동 3권을 쟁취하기 위해 나선 날로 기억되길 바란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헬멧, 방패, 몽둥이, 보호대 등으로 완전무장해 마치 경찰 특수기동대처럼 보이는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이 2011년 6월 회사에 들어오려는 유성기업 노조 조합원들과 대치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제공

[왜냐면] 김성민ㅣ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장

2011년 5월18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직장 폐쇄”.

갑자기 회사 문을 닫는다니…. 그것도 노동조합원에 한해서만 문을 걸어 잠갔다.

유성기업은 주·야간 10시간씩(간혹 12시간씩) 2교대 사업장이었다. 노동자들은 “2급 발암물질”(국제노동기구)인 심야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실제 2000년대 이후 노동자 2명이 자다 숨졌다. 노동조합은 아침부터 8시간씩 근무해 자정에는 모든 교대근무가 끝나는 주간 연속 2교대제를 제안해 교섭 중이었는데, 회사는 갑자기 직장폐쇄에 나섰다. 직장폐쇄 뒤 용역깡패들이 공장문을 걸어 잠그고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몰아붙였으며, 10년간 이어진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고난의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 27명이 해고되고, 89명을 상대로 17억5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됐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실제였다. 노조파괴 전문 노무법인인 창조컨설팅과의 사전 회의에 따른 직장폐쇄 준비, 복수노조 가입 등을 종용한 원청인 현대자동차 쪽과의 전자우편 자료 등을 손에 넣고도 검찰은 회사와 경영진을 불기소 처분했다. 2014년 12월31일 법원이 검찰에 기소를 명령하는 재정신청을 받아들인 뒤에야 유시영 대표와 본사는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질 수 있었다. 2017년 유 대표는 구속됐고, 부당노동행위를 공모한 현대자동차 임직원들과 창조컨설팅 대표 등도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20년 12월31일에야 우리 민주노조는 부족하나마 회사와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0년의 투쟁에서 승리해 민주노조를 지킬 수 있었지만, 수많은 노동자가 징계·해고·차별·멸시·모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2016년 한광호 열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불의에 항거해야 했다. 이는 비단 유성기업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2009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당시 위원장 추미애)는 국회 질서유지권을 발령한 끝에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소수노조의 교섭권과 파업권을 제한하는 ‘복수노조 창구단일화’를 도입하는 노조법 개악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본회의까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명박 정권은 노동부, 경찰, 검찰을 통해 노동자들에게는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을 강조하면서도, 자본의 위법·불법·탈법에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이중기준을 적용했다.

그 결과, 2010년부터 구미 케이이씨(KEC), 경주 발레오만도, 세종시 콘티넨탈, 보쉬전장, 만도, 여러 병원사업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주노조가 직장폐쇄, 용역깡패 투입, 선별 복귀, 복수노조 설립이라는 똑같은 패턴 속에서 파괴됐다. 사쪽은 민주노조의 조합원 수가 적을 때는 창구단일화 절차를 거쳐 ‘어용노조’에 교섭권을 줬고, 민주노조가 죽을 각오로 조합원을 조직해서 과반을 이뤄 교섭대표 노조가 되면 어용노조와의 ‘개별교섭’에 나서며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조치를 악용했다. 단결권, 단체행동권과 함께 노동 3권 가운데 하나인 단체교섭권을 자본에 바친 결과, 수많은 민주노조는 교섭권을 박탈당한 채 현장에서 각종 차별을 당하고 각종 위험에 노출돼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없었다. 이런 노조 파괴 광풍에서 몇 안 되게 버틴 노조가 유성기업지회다.

1980년 5·18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면, 2011년 5·18은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항쟁이 시작된 날이다. 단순하게 유성기업 노동자들만의 투쟁일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온전한 노동 3권을 쟁취하기 위해 나선 날로 기억되길 바란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