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바람과 비 맞으며 자연을 '현상'한 캔버스 작품들
공동묘지와 그 옆 미술관. 둘 사이에 빈 캔버스 하나가 덜렁 세워졌다.
사진작가 김아타(66)씨가 두달 전 벌인 작업이다. 죽은 자와 예술의 영기가 끊임없이 뒤얽히는 작업 무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한국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순례해야 할 두개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민주화운동 중 산화한 열사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모란공원 묘지와 한국 조각계의 오아시스로 꼽히는 한국 현대조각 컬렉션의 명가 모란미술관이 서로 영역을 맞대고 있다.
김 작가는 3월 초 열사들의 무덤과 미술관 영역 사이에 베이지색의 텅 빈 캔버스 틀을 놓으면서 ‘모란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앞으로 2년 가까이 이 화폭에 자연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이슬과 벌레들이 달라붙으며 형성할 평면의 이미지들을 기다리는 것이 작업 과정이 될 터다. 화폭은 마냥 외롭게 혼자 방치된 것이 아니다. 바로 옆에는 1999년 작고한 조각가 류인이 필사적인 에너지를 기울여 작업한 남자 군상들의 대열이 실룩거리는 근육의 촉감을 빛내며 자리하고 있고, 이곳을 찾을 숱한 관객들의 눈길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대 이후 사진계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공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김 작가가 12년 만에 모란미술관 전시장에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어 내놓는 근작과 신작들 또한 비슷한 얼개와 정체성을 담았다. 세계 곳곳의 자연 공간에 캔버스를 그냥 세워놓고 수년간 바람과 비를 맞게 하면서 그곳 특유의 대기와 세월을 담아내는 작업들이다. 렌즈를 단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고 셔터를 누르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롯이 자연 자체의 힘으로 남긴 흔적을 보여주는 전시다.
‘자연하다’라는 뜻의 ‘온 네이처’란 제목을 단 이번 신작전은 칠레 아타카마사막과 인도의 고대 불교 성지 부다가야, 미국 뉴멕시코주 샌타페이 인근의 인디언 거주지, 강원도 삼림지대 등 국내 곳곳에 캔버스를 세우고 나서 수년 뒤 수거한 화폭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보여준다. 1층과 지하층 전시장의 작업들마다 캔버스가 맞닥뜨렸던 지역의 기후와 풍토가 지닌 특유의 정체성이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다.
습기가 거의 없고 광풍이 몰아치는 아타카마사막의 건조한 지대에서 두해 이상을 견딘 캔버스는 신산한 김아타 근작을 단적으로 대표한다. 바람의 등쌀에 뒤를 받친 격자형의 틀이 그대로 평면에 아로새겨졌고 작은 모래알이 수없이 부딪힌 쌀알 같은 흔적들이 흉터처럼 남았다.
천이 짙은 색으로 변색되고 곳곳에 상처가 남고 뒤쪽의 틀이 역시 드러난 부다가야의 캔버스는 석가모니의 득도지라는 명성과 달리 그곳을 오가는 숱한 수행자와 주민들의 거세고 모진 기운을 흔적 자체로 짐작하게 한다. 작가는 “부처가 힘든 땅에서 사람과 자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화폭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주변에 놓은 캔버스에는 밀물로 광장이 물에 잠기는 아콰 알타의 흔적이 묻어나왔고, 샌타페이의 캔버스는 인디언의 영혼처럼 티끌 없이 맑은 표면을 드러냈다. 강원도 홍천의 전원지역 숲 아래 지하에 묻고 2년 뒤 파낸 것은 사람의 인골 같다. 흙 속에서 산화되어 울긋불긋한 형상을 나타냈고, 제주 바닷속에 들어간 것에는 물고기를 비롯한 바다 생물들이 오묘한 형상을 남겨놓았다. 더 나아가 작가는 군부대의 포탄 사격장을 찾아가 탄착점에 캔버스 천을 놓고 포 발사 뒤 만신창이가 된 천을 다시 수거해 캔버스에 붙이고 착색하는 작업을 벌여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표현한 근작들도 내걸었다. 렌즈에 포착하고 찍는 것으로 표현했던 실존의 의지를 캔버스를 지역과 자연에 의탁하면서 오롯이 던지는 행위를 통해 성찰하겠다는 의도가 읽히는 작업들이다.
김 작가는 1990년대 이래 절집이나 도시 거리를 배경으로 알몸의 인간군상들을 유리상자 안에 포개 넣거나 세계 곳곳의 특정 도시 사진들을 수없이 찍은 뒤 하나로 포개 공허한 사진으로 만드는 작업들을 벌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저간의 유명세를 뒤로하고 사진의 경계를 벗어나는 작업에 10여년간 몰두한 배경을 묻자 그는 20여년간 프로젝트 해보고 나니 어느덧 자연 자체에 가 있더라는 선문답을 내놓았다. 작업의 완성도나 의미론적 맥락과는 별개로, 무엇이든 점찍은 소재나 작업 방식은 극한까지 확장을 시도하고 강렬하고 확연하게 드러낸다는 김아타 특유의 작가 의식을 실감시켜주는 전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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