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원전 폐연료봉 처리 ‘발등의 불’

김승범 사회정책부 차장 2022. 5. 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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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년부터 저장 공간 포화
탈원전 文 정부, 5년간 허비
저장 시설 짓는 데 6~7년 걸려
가동 중단 사태 벌어질 수도
올해 준공된 경북 경주 월성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맥스터)./한국수력원자력 제공

2016년 11월 대만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궈성(國聖) 원전’ 1호기가 가동을 멈췄다. 무슨 사고가 난 것도, 고장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사용후핵연료(원전 가동 후 나오는 폐연료봉)를 저장할 공간이 더 이상 없어 원전 돌리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진작에 예견된 문제였지만 대만 전력 당국은 제때 해결하지 못했다. 2016년은 탈(脫)원전을 표방한 차이잉원(蔡英文) 정부가 출범한 해였다.

그렇다고 전력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대만이 전체 원전 설비 용량의 20%를 차지하는 궈성 1호기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대만 전력 당국은 교체 작업 중인 핵연료를 일시적으로 놔두는 저장조를 사용후핵연료 저장 시설로 개조했다. 궈성 1호기는 여름철 전력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한 2017년 6월 재가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임시방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궈성 1호기는 40년 수명이 끝나는 작년 12월 말 영구 정지될 예정이었지만 사용후핵연료 저장 공간 부족으로 작년 7월 조기 폐쇄됐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내 사용후핵연료는 원전 내에 임시로 저장하고 있다. 땅속 깊은 곳에 묻어 처분하는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시 저장 공간은 점차 바닥나고 있다. 2031년 고리·한빛 원전부터 2032년 한울 원전 등 순차적으로 포화 상태에 이를 전망이다. 탈원전 폐기를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원전 가동률을 올리면 포화 시점은 앞당겨질 수 있다. 임시 저장 시설은 짓는 데 인허가 기간을 포함해 6~7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로서는 언제 착수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궈성 1호기 가동 중단 같은 사태가 국내에서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가 갑자기 터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문제 해결에 미적거리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키웠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7월 사용후핵연료 관리 기본 계획을 세웠다. 부지 선정부터 총 36년에 걸쳐 처분장을 건설해 2053년 가동하는 게 목표였다. 계획에는 처분장 가동 전에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를 임시 저장하는 시설을 확충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계획대로라면 문 정부 임기에 처분장 부지 선정 작업이 진행돼야 했다. 하지만 문 정부는 이 계획이 지역민과 시민 단체 등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2017년 재검토에 들어갔다. 지난해 12월 새로운 계획 초안을 발표했는데, 부지 선정 기간을 12년에서 13년으로 1년 늘린다는 내용 정도를 빼면 전 정부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처분장 가동 목표 시기만 6년 늦춰진 셈이다.

문 정부가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에 미온적이었던 것은 단지 생색 안 나는 일을 다음 정부로 떠넘기는 차원이 아니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시간을 끌어 사용후핵연료 시설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원전 생태계가 더 빨리 마비된다는 것을 노린 탈원전 전술 아니었느냐는 얘기다. 문 정권 시절인 올해 초 산업통상자원부는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가 구체적으로 결정되기 전까지 원전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은 사용후핵연료 처리 기준을 원전의 설계 수명 내 발생하는 것으로 한정해 사실상 수명 연장을 봉쇄하는 내용의 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 이행’을 주요 국정 과제로 삼았다. 미룰 수도 없는 과제다. 전 정부가 팔짱을 낀 채 5년을 허비하면서 일정이 빠듯해졌다. 어려운 문제는 뒤로 돌리는 ‘님트(not in my term·내 임기엔 안 돼) 정부’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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