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4] 피해자 중심의 과학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2022. 5.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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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공식 사망자만 1742명으로 집계된 ‘단군 이래 최악의 참사’다. 그 외에 폐 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 암과 천식 환자. 알레르기나 피부병을 포함한 전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사망자 대부분을 낸 PHMG/PGH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회사 임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CMIT/MIT 살균제를 제조한 회사 임원들은 2021년 초에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은 기업은 벌을 다 받았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은 기업은 무죄라는 이유로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형사재판에서는 엄격한 인과관계를 밝히지 못하면 죄를 묻기 어렵다. 여기서는 동물 실험 등을 통해 인과관계를 밝힌 과학을 증거로 채택한다. 그런데 최근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쓴 박진영은 가습기 살균제 같은 사회적 참사를 해결하려면 학술 과학(academic science) 대신에 ‘피해자 중심의 과학(victim-oriented science)’이 권위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술 과학은 호기심에서 비롯해서, 실험실에서 진행된 뒤에, 논문으로 출판되면서 동료 평가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피해자 중심의 과학’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사회적 정의·윤리라는 차원에서 시작해서, 실험실과 현장 모두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피해자를 포함한 사회적 구성원들의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피해자 중심의 과학은 좁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역학적 상관관계, 혹은 통계적 유관성을 주목한다. 개정된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은 역학적 상관관계만 보여도 피해자로 구제받을 근거를 만들었지만, 이런 취지가 법정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 ‘공기 살인’이 개봉되어 화제다. 이 영화는 교훈과 재미를 모두 담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겠다던 제작진의 다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한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새 정부가 말뿐인 사과 이상의 적극적 조처를 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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