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藝인] '세계적 조각가' 내려놓고 통영바다로 흘러갔다
고향 통영바다 그린 15년 걸친 회화 작업
푸르러서 검푸른, 세로선만으로 바다표현
1000호 규모 등 압도적 작품 40여점 걸어
"회화는 조각 연장, 밀린 숙제 하듯 작업"
100호 1억4000만원..작품가 고공행진 중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경남 통영이 고향인 그이는, 세계를 돌고 돌아 다시 통영 앞바다로 왔다. 흙에서 시작해 흙으로 돌아가는 누군가가 있듯, 자신은 태어난 바다로 돌아간 것뿐이라고.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고 하는 것, 그게 세월이고 시간이더라”고 했다.
낙향을 했나 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몸이 향하는 것 그 이상이다. 조각가, 그것도 세계가 주목하는 ‘성공한 조각가’가 뜻밖에도 ‘바다그림’을 그리겠다고 한 거였으니까. 그러곤 주저 없이 정 대신 붓, 끌 대신 물감을 들고선, 푸르러서 차라리 처연하다 할 고향 통영 앞바다를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 심문섭(79). 세상이 정한 장르가 무색하리만큼 경계를 뛰어넘는 직품활동을 해온 이다. 하지만 단연 두각을 나타낸 건 조각이었다. 흙·나무·돌·쇠 등 자연을 소재로, 조각을 부정하는 ‘반(反)조각’을 했더랬다. 덧붙이고 치장해 재현하기보다, 최소한으로만 손을 대 마치 ‘날것을 빚은 듯한’ 형체를 꺼내놓는 작업 말이다. 형식을 파괴하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좌대에 세우는 대신 벽에 기대두거나 바닥에 내팽개쳐 두는 등의 ‘파격’도 일상이었다. 그랬던 그이가 회화작업을 곁눈질한 것도 모자라 “푹 빠져 있다”고 하니.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펼친 ‘물(物)에서 물(水)로’ 전은 바로 그 현장이다. 조각가 심문섭이 평생 쌓아온 작품세계에서 또 한 번의 파격이 될 지점을 짚게 될 대규모 개인전에는, 그이가 세상에 완전체로 꺼내놓은 회화작품 40여점을 걸었다. 전시타이틀은 유형의 물질인 ‘물’에서 무형의 물질인 ‘물’로 간다는, 그래서 조각에서 회화로 흘러가는 여정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하지만 복잡한 암시를 품었다. 하지만 작가는 조각과 회화가 다른 길이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회화는 조각의 연장이라, 붓을 들고 긋기를 계속하는 행위는 끌로 나무를 내려치던 일처럼 낯설지 않더라”고 했다. “그저 좀 늦어진 것일 뿐 밀린 숙제하듯 시간을 압축해 그린다”고도 했다.
6m 육박한 대작 회화…1000호 작품도 걸어
‘전시장을 휘감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작가의 ‘통영바다 그림’들이 말이다. 직접적인 묘사보다 “내 뇌리에 박힌 어떤 하나의 바다를 표현했다”는 작가의 말 그대로다. 푸르고, 더욱 푸르고, 그러다가 시커멓게 변해 검푸름이 된 작가의 그림들은 오로지 세로로 그어낸 붓질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바닥 모를 심연 속에 담가 버린다.
그 속에서 버둥대며 뭘 구분한다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인지, 그래서 작품명은 하나뿐이다. ‘제시: 섬으로’(The Presentation: To the Island). 장소와 시간의 의미를 함축하는 그 타이틀로 먼 ‘제시’와 가까운 ‘제시’, 깊은 ‘제시’와 가벼운 ‘제시’ 등을 쏟아낼 뿐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회화작품 40여점의 강렬한 포인트는, 여러 사람 기죽이게 하는 ‘대작 행렬’이다. 200호(182×259㎝) 규모의 ‘제시’(2015)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200호(194×224㎝)의 ‘제시(2015)도 있다. 100호(162.2×130.3㎝) 규모의 캔버스를 6점 이상 붙여야 나올, 가로·세로 582×260㎝에 달하는 ‘제시’(2018)가 걸렸고, 어디서 흔하게 볼 수도 없는 1000호(400×360㎝) 규모의 ‘제시’(2020)도 걸렸다. 오히려 100호 미만의 ‘아담한’ 사이즈가 귀하달까.
이 큰 작업을 어찌하느냐 물었더니 “손 닿는 데까지 수십번 긋고 칠한다”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멀리서 보이는 것처럼 두툼한 마티에르가 온통 뒤덮인 건 아니다. 물감 두께는 생각보다 얇다. “두껍게 바르니 길이 안 나오더라”고 했다. 우선 유화물감으로 그 ‘길’이란 걸 내고, 정작 색을 입히는 건 아크릴물감이란다. 유성의 기름과 아크릴의 물이 반발해 잘 묻어나질 않기 때문에 ‘수십번 칠’은 불가피하다. “지워지면서 다른 게 태어나는데, 똑같은 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결국 시간에 맡긴다. 행위가 정리되면서 나도 생각지 못한 질서가 펼쳐진다.” 바로 한줄 한줄 새긴, 닮은 듯 다를 수밖에 없는 그이만의 바다형상을 말하는 거다.
이번 개인전은 5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 형식으로 연 ‘심문섭, 자연을 조각하다’(2017) 이후 가장 규모가 크다. 압도적인 회화 40여점 덕에 정작 본업인 조각은 뒷전으로 밀린 셈이지만, ‘조각가 심문섭’을 찾을 수 있는 흔적이 없는 건 아니다. 테라코타 조각작품 20여점을 함께 내놨다. 책처럼 빚고 쌓아 철실로 묶어 바닥에 던져둔 ‘제시’(2010) 연작을 비롯해 벽에 매단 ‘토상’(2002) 연작 등, 조각에서 가장 기본이라는 원초적 붉은 흙 작업을 어울렸다.
한줌 흙으로 가는 길에 만난 ‘바다’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더랬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1965)한 지 3∼4년 만에 출품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3회 연속 입상한 건 그냥 시작이었다. 이후 파리비엔날레(1971)를 출발지 삼아 ‘비엔날레 단골작가’가 됐는데. 파리에 연거푸 3회를 비롯해 상파울루비엔날레(1975), 시드니비엔날레(1976), 베네치아비엔날레(1995·2001)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일본·미국·유럽 등의 주요 도시에서 연 개인전도 30회 이상이다. 결국 해외무대가 좁다 하고 여기저기 세운 그이와 그이의 조각작품이 가진 가치를 알아본 프랑스가 ‘문화예술공로 슈발리에 훈장’(2007)을 수훈하기도 했다. 아마 여기까지라 해도 ‘일가’를 이뤘다 할 만한데, 그이의 전진은 끝이 없었던 거다. 뒤늦은 회화작업에 뛰어든 게 딱 그즈음이라니. “세상에 처음 그림을 꺼낸 건 2년 안팎이지만 구상·습작부터 따지자면 15년쯤 됐다”고 했다.
그림으로는 이제 막 ‘신진’을 뗐을 뿐인데, 작품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100호 기준으로 1억 4000만원에 거래되는 등 전시작 40여점에는 벌써 대부분 주인들이 나섰다. 사실 지난 3월 화랑미술제에서 그 싹을 봤더랬다. 7000만원을 단 50호 작품들이 단숨에 팔리며, 없어서 못 파는 ‘화가’ 반열에 올랐으니. 15일 폐막한 ‘아트부산 2022’에선 120호 작품이 1억 6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굳이 왜?’가 풀리지 않는다면 그이가 쓴 시 한 편이 도움이 될 듯하다. “어떤 세계를 꿈꾸었지/ 거짓도 꾸밈도 없는/ 자연의 본성 위에/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길에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흙으로부터’·심문섭 시화집 ‘섬으로’에서). 결국 그이는 ‘바다라는 이름의 흙’을 조각하고 있었던 거다. 전시는 6월 6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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