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된 신체 일부 재창조 실험.. 인간의 변형 욕망 표출하다

김예진 2022. 5. 16. 21: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현대미술작가조명 Ⅳ- 이형구 개인전
20년간 '몸' 탐구해온 작가의 상상력
독창적 형태로 가상의 육체까지 구현
시리즈별로 인체에 대한 인식 드러낸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100점 선보여
8월7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서 전시
‘Pink Vessel’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거대한 분홍빛 관이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공중에 떠 있다. 미술관 로비, 부드러운 곡선으로 공간을 감싸듯 어우러진 모습이 현대적 풍경화로 연출된다. 이 분홍 관 내부에는 빵빵하게 공기가 가득차 순환하고 있다. 관은 그 덕에 형태가 유지된다. 순환은 잠시도 멈춰선 안 된다. 마치 쉼 없이 운동하는 심장에서 나와 온몸으로 혈액을 운반하는 혈관 같다. 인체가 연상되는 형태들로 독창적인 풍경을 만들어온 작가 이형구(51)의 신작 ‘핑크 베슬’(Pink Vessel, 2022)이다.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지점에 위치한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 ‘한국현대미술 작가 조명’전을 열어온 부산시립미술관이 네 번째 주인공으로 이형구 작가를 선정하고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20년간 몸을 탐색해온 작가의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약 100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 작가는 경쾌하면서도 집요하게 몸을 탐구해온 작가로 유명하다.
 
이형구는 20여년 전 미국 예일대 대학원 조소과 유학 시절,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자신의 손이 주변 다른 사람들 손보다 유독 작다는 것에 눈길이 갔다. 아마도 비교 대상은 서구 남성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생각은 ‘내 손을 크게 키울 수 없을까’라는 데로 이어졌다. 페트병들을 오리고 이어 붙여 손에 끼우는 장갑 형태를 만들고, 돋보기처럼 특정 부위를 과장돼 보이게 하는 굴절 장치를 더했다. ‘디 오브젝투얼스(The Objectuals)’ 연작의 시작이었다.

신체 일부를 변형하고 과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기구들을 만들어 몸의 한계를 벗어났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기능을 하도록 보조장치들을 발명해나갔다. 손이 커보이는 장갑, 눈이 커보이는 헬멧 등이 탄생했다.

이형구는 인간의 사상사에서 대접받지 못한 신체에 주목한 작가로, 또는 인간의 변형 욕망을 표출한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기계와 기술로 신체를 연장하고 변형, 재창조하는 포스트휴먼담론 표현으로도 읽혔다.
‘디 오브젝투얼스(The Objectuals)’ 연작 중 ‘Altering Facial Features H-WR’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작가는 자신의 발명품들로 눈이나 손 등이 과장된 작품들에서 애니매이션 캐릭터들을 떠올리고는 새로운 작품을 이어갔다. ‘아니마투스(Animatus)’ 시리즈다. 작가가 어린 시절 봤던 미국 만화 영화 속 주인공들을 소재로 마치 해부학자나 고고학자가 된 듯 만화 캐릭터들의 골격 구조를 상상하고 드러냈다.
신체를 탐구하는 그의 상상력과 호기심은 마르지 않았다. ‘겹눈을 가진 곤충이 될 수 없을까’, ‘양 측면에 눈이 있는 물고기들은 앞을 어떻게 볼까’. 그의 실험은 계속됐다. 기수가 말을 타고 한몸처럼 우아하게 달려가는 마장마술 풍경을 보고는 아예 자신이 말이자 기수가 되기도 했다. 영상 작품 ‘메저(Measure)’ 속 작가의 은발은 말의 꼬리로 연장돼 야무지게 찰랑대고, 이형구의 발에서 나는 또각또각 소리가 말발굽 소리처럼 들린다.
‘Measure’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그의 실험들은 국내외 주목을 받았다. 주목되는 신진작가 발굴 성격의 전시들인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전, 삼성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전에 이어 2007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인전, 2008년 스위스 바젤 자연사박물관 전시 등 활발한 활동을 선보였다.

이형구의 작품은 최근 여러 이름 난 전시들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큐레이팅 특색이 유독 돋보인다. 작가의 대표 연작들을 모아 해당 작품들을 가장 극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이 구현됐다. 다른 시리즈로 넘어갈 때마다 새로 만나는 공간들 간 대비, 전시 전개의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큐레이팅을 따라 관람객도 이형구의 예술세계를 그야말로 ‘종횡무진’하게 된다.

전시장 입구 로비에서 설치조각 ‘핑크 베슬’을 통해 인간 몸 일부를 풍경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작가 특유의 ‘신체 소우주론’을 암시하며 전시가 시작되더니, 관람 코스의 절정에 ‘케미컬(Chemical)’시리즈가 펼쳐진 코너에서는 그야말로 작은 우주 공간을 펼쳐낸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경계선이 희미해진 공간에 신체 내부, 내장 기관이 연상되는 형태의 작품들이 부유하고 있다. 안내에 따라 신발을 벗어 놓고 전시장에 들어선다. 예상 못한 ‘맨발 관람’에 당황은 잠시일 뿐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관람객의 감각이 발끝부터 예민하게 살아난다. 자유가 된 발로 작품들 사이를 마음껏 거닐다보면 어느새 소우주를 즐기게 된다. 김경미 학예사는 “처음엔 흰 바닥을 어떻게 보호할까 대책을 궁리하다가 관람객이 신발을 벗도록 했는데, 하고보니 일종의 ‘입장 효과’가 있는 걸 확인했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관람객의 집중력과 감각이 극대화된다”고 설명했다.
‘Fish Eye Gear’와 ‘Creeper’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케미컬’ 연작을 관람하는 방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공간은 전시 초반 ‘아니마투스’ 연작의 방이다. ‘케미컬’ 연작 방과는 정반대로 바닥, 벽, 천장이 새까맣게 칠해진 공간에 이번엔 만화 캐릭터들의 골격 조각들이 둥둥 떠있다. 제리를 잡으러 앞발을 들고 뛰는 톰은 그대로 멈춰 화석처럼 변한 듯하고, 쿠피와 도널드덕, 트위티, 실베스타, 벅스버니가 만화 속 역동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상의 자연사박물관에 찾아온 듯, 또는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듯, 인간이 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보는 듯해 다양한 시각 상상을 하게 한다. 인간의 눈과 시각, 인지능력에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려해 온 작가의 호기심이 전시 방식에도 그대로 담겼다. ‘아니마투스’ 시리즈들은 죽어 화석이 된 형태처럼 검은 배경에 뼈를 드러낸 것인데, 가상의 캐릭터들이 마치 한때 살아있는 생명들이었던 것인 양 전제하고 보니 삶과 죽음이 역설적으로 교차한다. 작품은 실제 동물의 뼈처럼 생생하고 세밀하다. 작가가 보조 10명과 1년을 작업해 한 마리를 완성했을 정도로 공력이 들었다고 한다.

전시를 보고 나면 ‘몸 쓰는 작가 이형구’를 넘어 ‘역지사지하는 지구인 이형구’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이 뛰어난 상상력으로 근미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면, 이형구의 예술은 근미래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다가오는 시대에 갖춰야 할 태도로까지 나아간다. 인류는 다르게 생긴 것을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왔다. 신체의 차이가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의 근간이 됐다. 흑인이나 여성, 장애인, 어린이나 노인이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열등한 신체부위를 과장하려는 욕망을 포착해 시작된 이형구의 세계는 성찰적 태도를 바탕으로 우등한 하나의 신체 기준을 해체하고 다양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인간의 곤충 되기, 물고기 되기, 말 되기, 동물 되기를 실험해온 이형구의 세계를 보며 그간 포스트휴먼 담론에 대한 선구자적 시선을 읽어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세계의 바탕에 역지사지와 공감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왜 지금 이형구일까를 생각하다가 성큼 다가오고있는 포스트휴먼시대, 그의 태도를 재발견하는 전시다. 8월7일까지.

부산=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