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령으로 중대재해법 무력화 현실화하나..양대노총 "경총의 개악 시도 강력 규탄"

이혜리 기자 입력 2022. 5. 1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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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민주노총과 건설노조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산재참사 2주기 및 산재사망 건설노동자 추모 행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하면서 양대노총이 강하게 반발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중대재해법을 계기로 경영계와 노동계 충돌이 촉발한 것이다. 건의서는 노동자 사망 사고에 대한 기업 책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노동계는 하위 법령인 시행령을 통해 중대재해법을 무력화한다고 비판했다.

16일 경총이 고용노동부·법무부 등 6개 부처에 제출한 ‘중대재해법 시행령 개정에 대한 경영계 건의서’를 보면, 대표이사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면제할 수 있고 원청업체로서 책임져야 하는 범위를 축소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중대재해법은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의 사업주나 현장소장, 안전관리자만 처벌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이다. 노동부는 앞서 해설서를 통해 중대재해법상 의무와 책임의 귀속 주체는 원칙적으로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대표이사)’라면서 ‘경영책임자에 준해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선임돼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대표이사의 의무가 면제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총은 경영책임자의 대상과 범위를 구체화해야 한다면서 대표이사 책임은 면제될 수 있도록 시행령에 관련 조문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부 입장대로면 경영책임자가 여러 명인 경우 모두 처벌받을 우려가 있다고 했다. 노동부는 그런 경우에는 개별 사안마다 판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경총은 안전보건에 관한 조직·인력·예산 등을 관리하도록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은 사람이 선임돼있다면 대표이사는 책임을 면해주도록 시행령에 명시해야 한다고 했다.

사망 사고의 피해 노동자 상당수가 하청업체 소속이라는 점에서 중대재해법은 원청업체가 ‘도급·용역·위탁 등 제3자의 종사자’에게까지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이는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로 한정했다.

경총은 이 범위가 불분명하고 원청업체의 책임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될 수 있다며 시행령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도급·용역·위탁 범위를 ‘사업 목적 수행과 관련성이 있는 도급 등’으로 한정하고, 임대와 발주는 제외하도록 명시해야 한다고 했다. ‘실질적 지배·운영·관리’의 의미에 대해서는 ‘시설·장비·장소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유해·위험요인을 인지하고 파악해 제거할 수 있는 등 사실상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로 좁게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앞서 국회의 법 제정 과정에서 발주에 대한 책임 조항이 빠져 논란이 됐는데, 경영계는 아예 발주는 법 적용에서 배제되도록 못박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1년 내 3명 이상 발생했을 때 중대재해에 해당하는 직업성 질병자 범위를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경우로 제한하고,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기업의 경영책임자가 받아야 하는 안전보건 교육시간은 기존 20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이는 내용도 건의서에 포함됐다.

상여 모양 선전물을 든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3월3일 서울 마포구 한국경영자총협회 건물 앞에서‘여천NCC 폭발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과 중대재해 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 후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에 요구안을 전달하기 위해 여의도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노동계는 경총의 시행령 개정안이 중대재해법 취지를 뛰어넘었다고 비판했다. 시행령은 법률에서 위임한 사항에 대해 행정부가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마음대로 법률의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경총 건의서는 단순히 중대재해법 조항을 구체화하는 것에서 나아가 규제 정도를 완화하거나 규제 대상을 줄이는 내용이라는 게 노동계 분석이다.

민주노총은 성명에서 “그동안 산재예방에는 동의하나 중대재해법이 사업주가 지키기에 모호한 것이 문제라며 보수 경제지를 통해 호도하더니 결국 경총과 사용자 단체가 원한 것은 대표이사가 처벌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며 “법에서 위임하지도 않은 내용을 시행령에서 정해달라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현장에서 기초적인 법 위반을 밥 먹듯 하고, 위험의 외주화로 하청, 특수고용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던 경영계가 국민의 72% 찬성으로 제정된 법의 무력화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후안무치한 행태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했다.

한국노총도 “시행된 지 100일 갓 넘은 법에 대해 경영계는 지속해서 산재 감소 효과 없이 현장 혼란이 심화되고 경영활동이 위축되고 있다고 호도하고 있다”며 “경총 건의서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 생명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개악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밝혔다.

한국노총은 윤석열 정부를 향해서는 “산재 예방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경영계의 입맛에 맞게 중대재해처벌법을 사문화시키는 것이 아니다”라며 “노·사·정이 합의한 산재예방 예산을 과감하게 확대하고,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통해 실질적인 산재예방과 감소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에서 중대재해법과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법령 개정 등을 통해 현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지침·매뉴얼로 경영자의 안전 및 보건확보 의무를 명확히 하겠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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