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인사이드] 국제중재와 변호인-의뢰인 특권

임수현 입력 2022. 5. 1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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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임수현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 고려대 법학과, 사법연수원 31기, 현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 및 ADR 위원회 위원, 전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사무총장

국제중재에서는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관련 문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주어지고, 상대방은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해당 문서를 제출할 의무를 부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절차를 문서 개시(document production) 절차라고 부른다. 국제중재 절차에서 문서 개시 절차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법원의 소송처럼 절차에 대한 자세한 규정이 없는 국제중재에서는 중재판정부와 당사자들 간의 상호 협의에 따라 구체적인 절차가 정해지고, 서로 다른 입장을 타협하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이든 당사자 또는 중재인의 기대에 부합하는 절차적 요소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영미법계 당사자, 대리인, 그리고 중재인들의 비중이 높은 국제중재에서 문서 개시 절차가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제중재 특성상 당사자, 대리인, 그리고 중재인들의 국적이나 원자격국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은데 문서 개시 절차가 없는 나라에서 온 참여자들이 그 과정에서 놀라는 일들이 가끔 있다. 


사진 셔터스톡

국제중재에서 법적 특권의 문제 

국제중재를 시작할 무렵에 필자가 겪었던 일화다. 당사자 한쪽은 대륙법계 국가의 기업(A사)이었고 상대방은 영미법계 국가의 기업(B사)이었다. 합의된 중재절차에 따라 당사자들은 문서 제출 요청서를 교환했고, B사의 요청 목록을 받은 A사는 오랜 시간의 검토와 숙고 끝에 제출을 거부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되는 문서를 선별해 제출 준비를 마쳤고 그 분량도 상당했다. 그런데 놀란 것은 B사의 대응이었다. B사는 A사가 요구한 문서 중 극소수의 문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요청 문서들은 ‘변호인-의뢰인 특권(attorney-client privilege)’이 적용돼 제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B사는 A사에 매우 광범위한 문서들을 공격적으로 요구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거래의 성질이나 정황상 갖고 있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되는 문서들을 특권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서 개시 절차에서 실무상 자주 접하게 되는 쟁점은 법적 특권(legal privilege)의 적용 여부 및 범위다. 문서 개시 절차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법적 특권에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의뢰인과 변호사가 법률문제에 관한 조언을 주고받은 비밀 서신의 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변호인-의뢰인 특권, 교신은 아니지만 변호사가 해당 분쟁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했거나 의뢰인(또는 의뢰인이 자문한 제삼자)이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생성한 문서를 보호하는 특권(attorney work product privilege), 그리고 합의를 위해 상대방과 주고받은 협의 문서 특권(settlement communications privilege) 등이 법적 특권의 대표적 경우다.

앞서 소개한 일화로 돌아가 보자. B사의 태도는 국제중재 절차의 근간이 되는 당사자 대등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하면서 A사는 강하게 항의했고, 몇 달간의 소모적인 절차적 공방 끝에 중재판정부는 추가 문서 제출을 명령했고, 일부 문서는 결국 공개됐다. 절차적 다툼은 그런 방식으로 일단락됐지만, 법적 특권에 관한 제도적 차이로 인해 A사는 불필요한 소모적인 절차에 휘말렸던 셈이었다.

이처럼 국제중재 참여자들이 각자 다른 법 제도의 적용을 받게 돼 한쪽은 특권을 주장할 수 있지만 다른 쪽이 그렇지 못할 경우 증거 현출의 비대칭성이 발생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당사자 대등의 원칙과 나아가 중재판정의 집행력에서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 하지만 법적 특권이 한쪽 당사자에게만 적용돼 그 적용을 전적으로 부정하면 형식상 공평해 보일 수는 있지만, 특권을 신뢰한 당사자의 법적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어 정당하게 행사되는 특권을 어느 정도 보호할 필요도 있다.


상이한 특권 제도가 충돌할 때 해결 방안 

이런 법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불균형을 해결할 때 적용되는 원칙이나 규정은 없다. 국제중재의 증거조사 방식을 다루는 세계변호사회의 증거규칙(IBA Rules of Taking of Evidence)이 2020년 개정됐으나, 문서 개시의 제외 사유가 되는 법적 특권의 적용에 관해서는 개정 전과 마찬가지로 원론적인 기준을 제시할 뿐 개별 사건에서의 결정은 중재판정부의 재량에 맡기고 있다. 실무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중재판정부는 IBA 증거 규칙의 기준 등을 참고해 구체적 타당성을 고려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 실무에서 널리 수용되는 해결 방법은 일명 ‘가장 우호적인 접근법(most favorable approach)’이다. 개별 사건에서 적용 가능한 여러 가지 특권 중 가장 보호 범위가 넓은 제도를 모든 당사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자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앞의 일화에서 만약 A사가 한국 기업, B사가 미국 기업이고, 미국 법제상의 보호 범위가 더 광범위하다고 가정한다면, B사의 특권 주장을 인정하되 A사에도 거기에 준하는 사유로 문서 제출 의무를 완화할 수도 있다는 식이다. 

슬로바키아의 5대 은행인 우체국은행(Poštová banka)과 그리스 정부 간의 ICSID 투자중재사건(ICSID 사건번호 ARB/13/8)의 절차명령에서도 가장 우호적인 접근법과 유사한 해결 방식이 언급된다. 이 사건에서는 신청인이 요청 목록에 있는 일부 문서들은 변호인 특권이 적용돼 제출할 수 없다고 항변했고 피신청인은 그런 특권은 제도상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에 대해 중재판정부는 신청인의 특권 주장을 수용하면서, 이 사건에서 적용되는 특권의 기준은 보호 범위가 가장 넓고 양 당사자의 기대에 부합하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국제중재 문서 개시 절차 대비한 문서 보존 필요

그러나 ‘가장 우호적인 접근법’을 채택하는 중재판정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문서 개시 절차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에는 증거 제출 과정에서 유불리가 갈릴 수 있다. 문서 개시 절차 또는 법적 특권의 법리에 친숙한 외국 기업들은 거기에 대비하는 업무 또는 문서 보존 지침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문서 개시 절차나 법적 특권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는 나라의 기업들은 그만큼 평소에는 대비가 덜 돼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회사의 현업 부서에서 내부적인 목적으로 분쟁의 법적 쟁점들을 자체적으로 분석하고 검토 결과를 남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 생성된 문서에 분쟁 전략상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할 수 있지만 ‘변호인-의뢰인 교신’ 또는 ‘변호인의 성과물’이라는 형식적인 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공개될 위험에 놓일 수 있다.

국제중재를 앞둔 기업이라면 중재 절차를 형성하는 단계부터 문서 개시 절차를 염두에 두는 전략적 대비가 필요하다. 만약 예상되는 분쟁의 성격상 사실관계가 상대적으로 간단해 상대방의 문서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면 문서 개시 절차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성향의 중재인을 선정한다거나 중재 절차 합의 단계에서 문서 개시 절차를 최소화하는 내용의 절차명령이 나오도록 협의하면 좋다. 그러나 그런 내용의 협의가 쉽지 않다면, 평소에도 회사 내부의 문서를 생성하는 단계에서부터 해당 내용이 법률 자문을 구하거나 받는 성질의 것인지, 분쟁에 대비한 법률 자문의 성과물로 분류되는 것이 적절한 내용인지 판단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형식을 갖출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상과 같이 국제중재에서 당사자 또는 대리인이 주장할 수 있는 법적 특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법제의 차이점을 인지하고, 이로 인해 증거 현출에서의 비대칭성이 발생하거나 무기 대등의 원칙에 반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미리 문서 생성 및 보존의 실무를 한 번씩은 점검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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