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의 기술 | '영업비밀의 묵시적 이용 허락' 대법 첫 인정] 한전 자회사 간 '설계 비법' 분쟁 해결한 법무법인 바른
‘영업비밀의 묵시적 이용 허락’ 어찌 보면 난센스다. 영업비밀은 말 그대로 ‘비밀’로 유지·관리돼야 성립된다. 특정인 또는 특정 회사에서만 노하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중한 영업비밀을 누군가에게 이용하도록 묵시적으로 허락했다면, 애초 그 비밀에 대한 비밀 유지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 의심이 든다.
이처럼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는 ‘영업비밀에 대한 묵시적 이용 허락’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첫 판례가 나왔다. 한때 한국전력이라는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법무법인 태평양 대리·이하 한국전력기술)와 한국남동발전주식회사(법무법인 바른 대리·이하 남동발전)의 영업비밀 침해 형사사건이 발단이었다. 이후 이 사건은 민사소송으로 확전됐고 결국 남동발전이 최종 승소했다.
진정에 고소까지 당했지만 모두 ‘무혐의’
통상 화력발전소를 지을 때 발전 자회사에서 설계 용역사에 소위 ‘큰 그림’을 그려주고 지시 발주를 준다. 그러면 설계 용역사가 발전사의 지시를 받아 설계 도면을 만들고 다시 발전사에 최종 확인을 받는다. 남동발전은 2009년 8월 인천 영흥화력발전소(이하 영흥) 5·6호기 설계를 앞두고 수년간 한국전력기술에 설계 용역을 주던 관행을 깼다. 설계 용역사 선정을 위한 일반 경쟁 입찰을 했지만 2회 유찰됐다. 결국 2009년 8월 수의계약 방식으로 현대엔지니어링과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민간 업체로 한국전력기술과 경쟁 관계다.
한국전력기술은 한국전력 자회사였을 때부터 여러 발전사로부터 거의 독점적으로 설계 용역을 수주했다. 영흥 1·2호기와 3·4호기 역시 한국전력기술이 설계 용역사였다. 나중에 짓는 ‘후행 호기’가 먼저 건설한 ‘선행 호기’의 수행 계획서를 참조하는 것은 업계에서 오래된 관행으로 통한다. 선행 호기에서 발견한 문제점을 반드시 후행 호기를 건설할 때 개선해야 하는 만큼, 선행 호기 설계 자료를 참조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에 현대엔지니어링은 2009년 8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남동발전으로부터 영흥 3·4호기 설계 자료 등을 건네받아 일부 내용을 수정 및 변경하는 방식으로 영흥 5·6호기의 설계 자료를 작성했다. 그러자 한국전력기술은 남동발전과 현대엔지니어링을 상대로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영업비밀누설 등) 혐의로 진정을 제기했다. 영흥 3·4호기 설계 용역 계약서 40조 1항(기술 정보를 한국전력기술의 승인을 얻어 사용해야 한다) 규정을 근거로 현대엔지니어링이 영업비밀을 부정하게 사용했고, 남동발전은 부정하게 공개했다고 주장했다.
수원지방검찰청은 ‘설계 자료의 영업비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불기소 처분(무혐의)했다. 이후 한국전력기술은 항고했고 서울고등검찰청의 재기 수사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2015년 이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단 영업비밀성은 인정)을 받았다.
‘결정적 한 방’ 1989년 삼천포발전소 계약서
형사사건에서 두 번이나 무혐의를 이끌어 내면서 “다 끝났다(정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고 생각했지만, 한국전력기술은 이번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남동발전이 영흥 3·4호기 설계 자료를 한국전력기술의 승인 없이 사용했고, 이에 손해 봤다며 10억원을 예비청구했다.
1심은 남동발전이 한국전력기술의 영업비밀을 침해했지만 현대엔지니어링은 침해하지 않았다고 봤다. 재판부는 부정경쟁방지법에서 규정하는 영업비밀의 침해 유형에 현대엔지니어링 행위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부정한 이익을 얻거나 영업비밀 보유자에게 손해를 입힐 목적이 아닐뿐더러, 남동발전의 영업비밀 침해 행위를 인지하지 못했고 단순히 일감을 전달받은 데 불과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 변호사는 “1심은 영흥 3·4호기의 설계 자료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지 여부에만 집중해서 판단했다”면서 “형사사건에서 모두 이겨 방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항소심에선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사건에 집중했다”고 했다.
아예 판을 새로 짜기로 했다. 후행 호기 건설 시 선행 호기 자료를 참고(카피 플랜트 설계 방식)하는 게 관행이라는 점에 착안, 1990년대부터 국내 모든 화력발전소의 설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정적 한 방’을 찾았다. 1989년 12월 9월, 한국전력기술과 하도급사인 현대엔지니어링 사이에 체결한 도급계약서다. 계약서에 따르면, 한국전력기술도 과거 삼천포화력발전소(이하 삼천포) 3·4호기의 설계 용역 계약을 수행하면서 현대엔지니어링이 작성한 삼천포 1·2호기의 설계 자료를 제공받아 이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전력기술도 현대엔지니어링에 별도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바른은 영흥 5·6호기 계약이 체결되기 전, 한국전력기술이 남동발전으로부터 ‘이 사건 설계 자료를 토대로 용역을 수행한다’는 취지가 기재된 수행 계획서를 2009년 교부받아 검토하고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2012년 말 진정을 제기했다는 점도 재판부에 피력했다. 정 변호사는 “이른바 설계 용역 협력사가 해야 할 업무를 적어둔 게 수행 계획서인데, 선행 호기 설계 용역사에 검수를 맡긴다”면서 “영흥 5·6호기 입찰 직전 한국전력기술에 보여주고 검토받은 적이 있는데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서울고등법원은 1심을 뒤집고 남동발전의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 역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 ‘영업비밀 보유자의 묵시적 의사 표시’ 첫 인정
대법원은 “영업비밀 보유자가 거래 상대방에게 영업비밀을 사용하도록 승낙하는 의사 표시는 일정한 방식이 요구되지 않고 묵시적 의사 표시로도 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특히 이와 같은 묵시적 의사 표시의 존재는 “거래 상대방과 체결한 영업비밀 관련 계약의 내용, 영업비밀 보유자가 사용하도록 승낙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범위, 관련 분야의 거래 실정, 당사자의 태도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건을 최종 승소로 이끈 정 변호사는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변리사로 근무하며 수백 건의 국내외 특허출원 업무 등을 수행했다. 그 경력을 바탕으로 2012년부터 지식재산권 관련 송무와 자문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재판부가 영흥 3·4호기 선행 호기 자료를 (1심처럼) 영업비밀로 볼 땐 어떻게 해야 할지에 천착했다”면서 “한국전력기술 측이 선행 호기 관련 자료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영업비밀을 부정하는 논거로 쓰지 않고, 전략을 바꿔서 명시적이 아닌 ‘묵시적 이용 허락’의 논거로 썼다는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급적이면 당사자가 계약서에 분명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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