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남북 협력의 가장 높고 넓은 고원

이제훈 2022. 5. 1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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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28

개성공단 가동으로 개성 근처 휴전선이 10㎞가량 ‘사실상’ 북상하게 된 셈이다. 임동원이 정주영한테 김정일이 ‘개성’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기지 않아 ‘혹시 현대가 속은 게 아니냐’”고 되물은 까닭이다. “개성공단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명을 공장에 넣겠다”던 김정일의 호언을 현실로 바꾸지 못한 건 아쉽고도 아쉬운 일이다.

2013년 9월 개성공단의 한 의류제조 공장에서 북쪽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개성공단사업은 남북 교류협력사에 가장 높고 넓은 고원이다. 두세기에 걸친 분단사에 5만명이 넘는 남과 북의 시민·인민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일한 공간은 개성공단뿐. 분단사에 유일무이한 대규모·장기 공존 실험이다.

그 개성공단이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의 ‘전면 중단’(10일)과 북쪽의 ‘폐쇄’(11일) 조처가 맞부딪치며 강제로 빠져든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긴 겨울잠이, 죽음 문턱에서 삶으로 되돌아 나오려는 처절한 생존투쟁이기를.

강제 겨울잠에 빠지기 전 개성공단에선 북쪽 노동자 5만4988명이 123개 입주기업에서 일했다. 누적 생산액은 32억3303만달러. 2004년 12월15일 시범공단이 처음 가동된 뒤부터 2016년 2월10일 공장의 기계가 멈출 때까지 하루하루는 말 그대로 전인미답의 여정이다.

개성공단은 정주영·김대중·김정일·노무현의 합작품이다.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의 훈풍이 강력한 배양기 구실을 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12월15~17일 방북해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 위원장과 “한국 중소기업이 입주할 2000만평 규모 서해안 공단 조성”에 합의했다. 정주영은 1999년 10월1일 함경남도 흥남 교외의 서호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황해도 해주에 공단을 짓자고 했는데, 김정일은 신의주를 역제안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6·15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6월 말 원산에서 정주영을 다시 만나 공단 터로 신의주가 아닌 개성을 제안했다.

마침내 ‘개성’이다. 당시 김정일은 “개성이 전쟁 전에는 원래 남쪽 땅이었으니 남쪽에 돌려주는 셈치고, 북쪽은 나름대로 외화벌이를 하면 된다”는 취지로 얘기했다고 한다. 당시 정주영이 ‘경남 창원공단’(2000만평, 50만명)을 선례로 개성공단의 밑그림을 설명하며 “개성공단이 창원처럼 되더라도 개성과 주변 인구가 30만명밖에 안 돼 노동력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김정일은 “북과 남에는 군인이 너무 많다. 그 단계가 되면 내가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명을 공장에 넣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개성공단 북쪽 노동자가 5만4988명에서 멈추지 않고 30만명까지 계획대로 확대됐다면, 군축의 강력한 배양기 노릇을 했을 수 있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개성은 어떤 곳인가? 박정희 정부에서 한국군 현대화 전략인 ‘율곡계획’을 입안한 군사전략가이기도 한 군 장성 출신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이렇게 적었다. “개성지역은 북측의 최전방 요충지로 군사전략적 차원에서는 결코 개방할 수 없는 곳이다. 개성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주공격축선상에 있고 개성 전방에는 서울을 사정거리 안에 둔 수많은 장거리포가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00년대 초반까지 개성공단 터에는 조선인민군 6사단, 64사단, 62포병여단 등 6만여 병력과 포진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북쪽은 개성공단이 본격 가동되자 이 부대들을 10~15㎞가량 뒤로 물렸다. 더구나 개성공단에 남쪽 사람들이 상주하며 터잡은 탓에 인민군으로선 기습공격의 요체인 은밀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됐다. 개성~문산 축선(개성~문산~서울)은 유사시 북쪽 인민군의 최단 서울 공격로다. 개성공단 가동으로 개성 근처 휴전선이 10㎞가량 ‘사실상’ 북상하게 된 셈이다. 임동원이 정주영한테 김정일이 ‘개성’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기지 않아 ‘혹시 현대가 속은 게 아니냐’”고 되물은 까닭이다. 2016년 2월10일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적 ‘전면 중단’ 선언으로, “개성공단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명을 공장에 넣겠다”던 김정일의 호언을 현실로 바꾸지 못한 건 아쉽고도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은 왜 남북협력 공단 터로 애초 선호하던 북-중 접경지인 신의주에서 남북 접경지인 개성으로 마음을 바꿨을까? 김 위원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신의주 특별행정구’가 중국 당국의 극력 저지로 좌초한 사연이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준다. 북한 당국은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제정(2002년 9월12일)하고 초대 장관에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자본가인 양빈 어우야집단(유럽아시아국제무역회사) 회장을 임명(2002년 9월24일)했는데, 중국 당국이 열흘도 안 돼 양빈을 연행해 뇌물공여와 사기 등 혐의로 구속해버렸다. 김 위원장은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방중했는데, 새 경제특구로 신의주를 선호하는 김 위원장한테 주룽지 중국 국무원 총리가 ‘남쪽’, 곧 개성이 더 적합한 곳이라고 ‘조언’(?)했다는 게 당시 북-중 관계에 밝은 고위 외교소식통의 전언이다.

김 위원장이 남북협력 공단 터로 애초 바라던 신의주를 버리고 개성을 낙점한 데에는 북-중 접경지에 경제특구가 들어서는 데 대한 중국 당국의 거부감에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 균형 발전”(6·15공동선언 4항)을 약속한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쌓은 신뢰관계 등이 두루 작용했을 수 있다.

2000년 8월22일 ‘개성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됐다. 개성지역에 2000만평 규모로 공업지구와 배후도시를 건설하고 성과를 보아가며 2000만평을 추가로 조성하며, 개성지역을 공업지구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상업도시로 건설해나간다는 원대한 구상이 담겼다. 합의 주체는 남쪽 현대아산, 북쪽 아태평화위와 민족경제협력연합회. 북쪽은 개성을 공업지구로 지정(2002년 11월13일)하고 ‘개성공업지구법’(2002년 11월20일)을 제정한 뒤, 현대아산에 개성공업지구 전체에 대한 50년간의 사용권을 보장하는 토지이용권을 발급(2002년 12월23일)했다. 통일부는 2002년 12월27일 현대아산과 한국토지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개성공단 공장 구역 1단계 조성공사 협력사업자로 승인했다. 개성공단 구상이 마침내 남과 북 당국 모두의 법적·행정적 지원을 받아 출발선을 떠나 간난신고의 긴 여정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03년 6월30일 개성공단 1단계(100만평) 개발이 시작됐다. 2004년 12월15일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첫 제품인 ‘개성공단 냄비’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시민들은 ‘라면을 끓여 먹기 송구하다. 가보로 물려줘야겠다’ 따위의 벅찬 소감을 올렸다. ‘개성공단 냄비’ 공장 사장은 “비싼 주방용품은 선진국에서 수입하고 싼 냄비는 중국에서 수입하고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망하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어 정말 기쁘다”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고진감래, 희망의 눈물이다. 신원에벤에셀·삼덕스타필드 등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쪽 기업들은 시범단지 가동에 앞서 북쪽 노동자들을 중국으로 데려가 기술연수를 했다.

2004년 12월 개성공단 시범단지 가동 당시 북쪽 노동자 월 최저임금은 50달러. 임금의 15%에 해당하는 ‘사회보험료’를 더해도 60달러를 밑돌았다. 공단 기반시설은 남쪽 정부가 책임지고 갖췄고, 서울·인천과 아주 가까운 군사분계선 바로 위쪽이라 물류 편의성도 높았다.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 등 숱한 악조건을 상쇄하고도 남을 개성공단의 매력이다. 한국에서 밀려나 중국에서, 인도에서, 베트남에서 고군분투하다 결국엔 경쟁력을 잃은 숱한 한계기업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개성이었다. 전체 입주기업의 58.4%가 섬유봉제·가죽가방 관련 업체인 까닭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신생아라 할 개성공단을 국제경쟁력을 갖춘 경제특구로 키우려 애썼다. 덕분에 개성공단은 해마다 몸집을 두배 넘게 불리며 빠르게 성장했다. 2005년 18개이던 입주기업은 2006년 30개로, 2007년 65개로 급증했다. 이들 기업에서 일하는 북쪽 노동자도 6013명(2005년)→1만1160명(2006년)→2만2538명(2007년)으로 늘었다. 연간 생산액은 1491만달러(2005년)→7373만달러(2006년)→1억8478만달러(2007년)로 수직 상승했다.

그렇게 ‘개성공단’은 “성을 열다”라는 개성(開城)의 말뜻 그대로 ‘3년의 동족상잔’ 이후 적대와 증오의 동굴에 갇힌 남과 북의 8천만 시민·인민을 공존과 상생의 꿈결 같은 꽃길로 이끌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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