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없이 '폭도' 낙인, 보상 0원.."보안대와 많이 싸웠습니다"

정대하 2022. 5. 1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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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그날의 진실]인터뷰│5·18 현장 검안의 문형배 박사
시위 중 군 과잉진압에 분노..손수레 2대 주검 목격
사체검안서 총상 크기 등을 수기로 꼼꼼하게 기록
"총상이 큰 희생자 부검해 헬기 사격 진실 밝혀야"
전남대병원 병리과 전공의로 사체 검안서를 작성했던 문형배 전 원광대 의대 교수가 지난 11일 전남 여수시 한 병원에서 만나 5·18 당시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헌혈을 호소했던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주검들을 검안하러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갔어요. 계엄사 요청이었습니다.”

‘5·18 최후 저항거점’인 전남도청이 계엄군 손에 떨어진 1980년 5월27일 아침, 당시 전남대병원 병리과 전공의 3년차였던 문형배(69·전 원광대 교수) 박사는 현장에서 20여구의 주검을 봤다. 그가 도착했을 때 도청 민원실 앞 아스팔트엔 식지 않은 피가 흥건했다.

지난 11일 전남 여수의 한 병원에서 <한겨레>와 만난 문 박사는 “그때의 그 슬프고 처참했던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다 살아남은 시민군 일부가 민원실 2층에서 붙잡혀 1층으로 끌려 내려왔다. 붙잡힌 시민군들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도청이었지만 현장 준비가 되지 않아 27일엔 검안을 하지 못했다.

헬기 사격 탄흔이 나온 광주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실탄 탄피. 광주시 제공

이튿날인 5월28일, 문 박사는 도청 건너편 상무관(경찰 연무장)에서 주검들과 마주했다. 1년이면 100여구를 부검했던 그였지만, 총상 사망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패가 진행되면서 체액이 흘러나오니 비닐을 덮어뒀더군요. 태극기로 감싸 놓은 주검들도 있었습니다.”

관을 열어 모든 주검을 검안했다. 함께 간 조선대병원 병리과 전공의 전호종씨는 도청 안팎에서 발견된 시민군 주검을 검안했다. 경찰 관계자가 주검의 상처에 자를 대고 사진을 찍었고, 모든 주검의 지문을 채취했다. 문 박사가 한 일은 상처의 위치 및 크기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총격 사망자의 경우는 총알이 들어온 사입구와 빠져나간 사출구를 구분하고, 크기나 위치 등을 모두 손글씨로 적었다.

1980년 5·18 때 전남대병원 의료진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전남대병원 제공

본격적인 사인 분류작업은 6월 초순 광주 화정동 505보안부대에서 이뤄졌다. 민간의료기관에서 사망으로 확인된 165명의 주검을 ‘폭도’와 ‘비폭도’로 구분하는 작업이었다. 문 박사와 다른 의사 1명, 보안부대원 등 11명이 참여해 사용된 총기의 종류, 총상 사입구와 사출구 위치, 사망 추정 시간과 주검이 발견된 장소에 따라 사인을 나눴다.

“보안대에선 진압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폭도’ 수를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폭도로 분류되면 1원도 보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 ‘비폭도’ 수를 늘리려고 했지요. 그 과정에서 저와 고 박규호 조선대의대 교수, 김재일 목사가 보안대 요원들과 많이 다퉜습니다.” 당시 보안대에선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발생한 사망자나 5월27일 최후 항전에 참여한 시민군의 주검은 별도 심사 없이 무조건 폭도로 분류했다.

5·18 당시 보안사령부 505 보안대에서 시민 희생자들 가운데 폭도를 분류하는 기준이 적힌 보안사 문건. <한겨레> 자료 사진

사실 문 박사도 항쟁 가담자였다. 5월17일 버스를 타고 가다 시위대와 마주친 그는 대열을 이끌던 고교 후배로부터 “전남대 교수들이 군인들한테 구타당했다”는 말을 듣고 시위에 동참했다. 공수부대원들이 군용트럭에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태운 뒤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5월20일 밤, 시민들이 ‘거짓보도’에 분노해 광주 엠비시 건물을 불태우고, 광주세무서로 몰려가 실탄 없는 카빈을 들고 나올 때도 현장에 함께 있었다. 5월21일엔 아침부터 시위대에 섞여 금남로로 갔다. 오전 9시쯤 주검이 실린 손수레 2대가 시민들 손에 끌려 나왔다. “두 대였어요. 한 대엔 갈색 옷차림의 주검이 있었습니다. 무릎이 꺾여 있어 골절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요.”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끌고 온 장갑차로 계엄군 방어선을 뚫었다. 최루탄이 무지막지하게 날아들었고, 시위대에선 부상자가 속출했다. 문 박사는 병원 상황이 걱정돼 전공의로 일하던 학동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사라진 교수들을 대신해 전공의들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오후 1시께 군인들이 금남로에서 집단 발포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안 가 총상 환자들이 병원으로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혈액이 동났다. 문 박사는 전남대병원 교차로와 충장로1가 일대를 돌며 병원 상황을 전한 뒤 헌혈을 당부했다. 무장을 시작한 시민군들도 차를 타고 시내를 돌며 헌혈을 부탁했다. 그날만 460명이 헌혈해 오후 6시가 되자 병원 혈액 냉장고가 꽉 찼다. 그런데도 아직 100명 넘게 헌혈을 하겠다고 줄을 서 있었다.

“그분들한테 ‘헌혈을 하셔도 더 저장할 공간이 없다. 다음에 와달라’고 설득했지요. 그랬더니 ‘왜 내피는 안 받느냐’고 울면서 항의하는 겁니다. 가슴이 저르르했습니다.”

항쟁 기간 그는 의사가 부족한 광주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가서 총상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도 했다.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로 시민들이 끌고 온 손수레 안에 주검이 실려 있다. 이 사진은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1987년 5월에 낸 <1980년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에 실려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지난 11일 여수 한 병원에서 만난 문 박사는 1980년 헬기 사격이 있었던 5월21일 사망한 고 김형관씨의 처참한 주검 사진을 본 뒤 “헬기 사격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5·18 때 검안한 주검 총상은 대부분 사입구가 0.5~1㎝, 사출구는 1~2㎝ 크기였는데, 김씨처럼 ‘10×7㎝’나 되는 총상 흔적은 다른 주검에선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엠16에 의한 총상이라고 적혀있는데, 제 경험으로는 아닙니다. 당시 희생자 가운데 총상 흔적이 컸던 주검을 다시 부검할 필요가 있어요. 헬기 사격 진실을 밝히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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