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덕'을 위한 K팝 '덕질' 설명서[창간기획X덕의세계①]

이유진 기자 2022. 5. 1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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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사진 제공 빅히트뮤직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됐다. 한국만의 독보적 시스템과 매력을 갖춘 ‘K팝’의 글로벌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한국 가요사는 물론 세계 가요사에도 굵직한 선을 긋고 있는 그룹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국내의 많은 가수들이 국경을 넘어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의 중심에는 일명 ‘덕’이 있다. K팝 아티스트의 팬덤과 그 문화를 일컫는 ‘덕’과 ‘덕질’은 세계 시장이 K팝과 함께 주목하는 ‘팬더스트리(팬과 인더스트리의 합성어)’다. 팬덤 없이는 스타도 없는 법. 스포츠경향이 창간 기획으로 ‘늦덕’에 밤 새는 줄 모르는 40대 여성기자의 ‘덕질일기’와 덕의 한계를 넘어선 능력자 팬 마케팅 매니저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통해 ‘덕의 세계’를 들여다 봤다.

■‘늦덕’ 에세이

미리 말해두자면 이 글은 불혹을 넘긴 기자의 K팝 덕질에 대한 사소한 주접글이자, 덕질 문화가 생소해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덕질 설명서이기도 하다.

‘덕계못’이라고 했던가. 필자는 스포츠경향 엔터테인먼트 부서에서 타부서로 이동을 하자마자 얄궂게도 한 K팝 그룹에게 ‘덕통 사고’를 당한다. 그렇다, 그것은 명백히 사고였다. 모 기업 부회장처럼 “이제부터 아미가 되어보련다” 계획하고 팬이 되는 이는 결코 없다. 그냥 ‘치이는’ 거다.

엔터 기자로 지냈던 지난 3년, 필자는 수많은 K팝 아이돌 그룹의 캡션(사진 설명) 작성을 눈앞에 두고 “K팝 아이돌은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멤버 수가 너무 많다”며 감히 짜증을 냈더랬다. 물론 쇼케이스, 인터뷰, 콘서트 등 K팝 관련 취재 일정에도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내가 ‘늦덕’이 될 줄이야…. ‘나와바리(영역)’를 떠나고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아버렸으니 때때로 밀려드는 늦은 후회는 그저 심미안을 갖추지 못한 내 업보려니 할 뿐이다.

필자는 X세대 끝자락, 1979년생으로 한국 나이 44세. 초중학교 때는 미국 보이밴드 백스트리트보이즈, 엔싱크에 열광했고 98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해서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단골 팝송 몇 곡쯤은 숙지하고 있어야 노래방에서 ‘인싸’되는 사대주의 충만한 시절을 보냈다. 물론 90년대 중반 ‘한류’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지만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 한정된 단어였다. 그런데 우리 아이돌 그룹이 ‘The World’s Biggest Boy-band’란 수식어를 갖게 되는 날이 오다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다.

덕통사고에는 약도 없어 ‘국뽕’과 ‘덕뽕’에 취해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했다. 밤이 되면 이불 속에 누워 홀연히 유튜브를 켰다. 어둠 속 블루라이트의 유해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데뷔 9년차인 그룹의 덕질이라 영상은 화수분마냥 무궁무진했다. 그것들을 심지어 나노단위로 쪼개어 ‘앓다보면’ 어스름 새벽빛이 창가를 수놓기 일쑤였다. ‘라이프로깅(Lifelogging·일상의 디지털화)’이라고 했던가. K팝이 글로벌 확장성을 갖게 한 이 전략 덕분에 마치 일거수일투족을 좇듯 그들의 무대 영상, 자컨(자체 콘텐츠), 연습 영상, 대기실 모습, 일상 V로그까지 섭렵해갔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덕밍아웃’한 스타들.


공식 영상뿐이 아니다. 팬덤에 의한 2차, 3차 재생산되는 콘텐츠의 향연은 K-창의력의 정수를 보여준다. 다 나열할 수 없으나 필자는 우울할 때마다 꺼내보는 팬 창작 영상이 한 편 있다. 한 멤버가 과자에서 별사탕만 모아 먹자, 다른 멤버가 다가와 “저 형 또 별사탕만 건져먹고 있네”하는 기존 영상을 무려 펠트 연형극으로 재연한 콘텐츠다.

최근 유안타 증권 산업 보고서에서는 K팝 팬덤을 ‘무보수 크리에이터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엔터사가 제공하는 1차 콘텐츠만으로는 생산성에 한계가 있으며 그 빈 곳을 채워주는 이들이 일명 ‘생산러’ 팬덤이다. 이들은 소비보다는 생산에 즐거움을 느끼며 덕질을 하고 이렇게 생산된 콘텐츠는 팬덤을 더욱 활성화하는데 기여한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홈마’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4월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2022 디올쇼’에 브랜드 측은 유명 아이돌 홈마에게 공식 초청장을 보냈을 정도다. 그들의 지대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다.

덕후들의 기획력과 추진력이 빛나는 때는 또 있다. 바로 ‘멤버들의 생일’이다. 일명 ‘생일 주간’은 마치 축제가 벌어진 듯 소속사 근처 담벼락에는 빈틈없이 ‘생축’ 플랜카드가 걸린다. 근처 카페들은 팬들의 대관으로 생일 파티장으로 변모한다. 그들은 굿즈까지 손수 제작해 나눔하며 생일을 기념한다.

멤버 간 관계성을 지칭하는 팬들의 네이밍 실력은 또 얼마나 기발한가. 맏막즈, 구사즈, 해달즈, 미니모니, 광산김즈, 고봉즈, 또또즈, 구월즈 등 고도의 상상력으로도 유추할 수 없는 이름이지만 그들의 히스토리를 알면 또 무릎을 탁 칠만한 적재적소 네이밍이다. 팬덤이 만들어낸 멤버 관계성 스토리는 미미한 개인팬을, 그룹 전체를 애정하는 ‘올라운더’ 팬으로 성장시킨다.

덕질을 하다보면 궁극에는 21세기 자수성가의 표본인 성공한 아이돌을 ‘손민수’하기에 이른다. ‘나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멋진 팬이 되고 싶다’ 덕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열망이다. 미드 ‘프렌즈’를 보고 공부했다는 국내파 영어능력자 멤버가 UN연설을 하는 모습에 필자는 접어두었던 영어 공부를 시작하며 화상 영어를 신청했다. 그뿐인가. ‘러닝을 시작했다’며 반포대교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한 다른 멤버를 따라 달리기도 한다. 우산 없는 폭우 속에서도 절대 뛰지 않았던 타고난 느림보가 말이다. 이제 러닝 인생 8개월 차. 필자는 여전히 3일에 한 번씩 5㎞ 거리를 완주하고 있다.

필자가 ‘덕밍아웃’을 하자 때로는 ‘그 나이에 무슨 아이돌 덕질이냐’는 주변 핀잔을 듣기도 한다. 뭐, 나 혼자 ‘어덕행덕’이면 그만이란 생각이다. 비록 ‘성덕(성공한 덕후)’은 되지 못했으나 필자는 오늘도 사부작사부작 행복한 덕질 중이다.

‘덕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 tvN ‘그녀의 사생활’ 의 한 장면.


*각인

덕계못: ‘덕후는 계를 못 탄다’라는 말의 준말. 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만날 행운을 얻지 못한다는 뜻.

덕통사고: 덕후와 교통사고의 합성어로 우연한 교통사고처럼 나도 모르게 팬이 된다는 뜻. 비슷한 용어로 ‘반한다’ 대신 ‘치인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함.

늦덕: 늦게 덕질에 입문한 팬.

앓이: 너무 그리워 마치 감기라도 앓듯 상대에게 빠져드는 현상.

볼매: ‘볼수록 매력있다’의 준말

홈마: 사진을 찍는 덕후 ‘홈페이지 마스터’의 준말. 과거 자신이 찍은 덕질 사진을 개인 홈페이지에 업로드하면서 생긴 단어.

손민수: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속 주인공을 따라하는 캐릭터의 이름.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덕밍아웃: 덕질과 커밍아웃의 합성어로 덕질을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어덕행덕: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의 준말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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