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두드러기[플랫]
[경향신문]
내가 그녀의 자취방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온몸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피부 여기저기가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채 팔과 다리, 등을 돌아가면서 벅벅(이라는 표현이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차게) 긁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아무런 대처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아직 의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며칠 전 평소 믿고 지내던 남자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한 상태였고, 그녀를 추행한 그 남자는 평소 내가 잘 알고 지내던 남자 후배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잘 아는 사람으로서 피해자의 대리인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근처 카페로 그 남자 후배를 불러내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얘기를 나누기 위해 나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자취방에 혼자 남기를 원했다.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당한 일이 자꾸 떠올라 참을 수 없이 초조하고 화가 치밀어올랐고, 그 몇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견디던 그녀는 내가 돌아갔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야밤에 나는 응급실이라도 가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두드러기도 이내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내 가라앉은 것은 그날의 두드러기일 뿐, 그녀의 분노와 실망감은 불면이 되어 오랜 시간 지속되었고, 그 후로도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올라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두드러기가 나타나곤 했다. 나 역시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그녀의 두드러기가 생각났고, 잘 낫지 않는 두드러기 환자들을 마주할 때마다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는지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지근거리에서 겪은 첫 두드러기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의학을 공부하며 알게 된 것은 이것이 일종의 ‘콜린성 두드러기’라는 사실이었다. 격렬한 감정을 느낄 때 우리의 심부 체온이 오르고 이것이 두드러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콜린성 두드러기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면, 그녀의 두드러기는 내 안에서 점점 더 붉어지고 커져갔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는 가려움, 피부가 붉게 여기저기 부어오르고 눈 주변이나 얼굴이 붓기도 한다. 평생 두드러기에 1번 이상 걸려 본 사람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넘을 정도로 흔한 증상이자 질환이라, 두드러기는 이미 환자들도 스스로 진단명을 찾아서 올 정도이다. “두드러기가 났어요”라고 말이다.
콜린성 두드러기도 꽤 흔한 종류의 두드러기이다. 술을 마시거나 맵고 뜨겁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후, 운동을 하고 난 직후, 샤워·사우나·목욕·찜질을 하고 나서 심부체온이 올라가는 것이 이 두드러기의 원인이니,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자주 생길 수 있다.
이렇게 흔한 두드러기인데도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꽤 많은데, 전체 두드러기의 절반 정도가 원인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평생 새우를 문제없이 먹어왔는데, 어제 저녁 새우 요리를 먹은 후 갑자기 두드러기가 났다면, 새우가 원인일까 아닐까 헷갈리게 마련이다. 음식이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운동이나 압박 같은 다양한 원인도 가능하고, 2~3가지 이상의 원인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두드러기, 오래 반복되는 두드러기, 감정변화와 연관된 듯 보이는 두드러기 환자들을 만날 때 그녀가 떠오른다. 모든 두드러기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어떤 이들의 반복되는 두드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는 것 말고 다른 치료가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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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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