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16. 모란공원묘원을 거닐다

손건웅 2022. 5. 1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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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버스를 타고 춘천에서 서울을 갈려면 반드시 지나는 곳이 모란공원입구였다. 화도를 통칭 ‘마석’이라 불렀으니 ‘마석 모란공원’이라 불렀는데 실제로는 공원묘원이다. 1966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공원묘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25만평 이상의 부지에 13,000여 기의 묘소가 안장되어있다. 그런데 1969년 권재혁, 1970년 전태일, 1973년 최종길 등의 묘소가 자리하면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분들을 잇달아 모셨다. 모란공원 초입의 일부에 자리한 ‘민주열사 묘역’에는 150여 분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절로 숙연한 느낌이 드는게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왔음이 실감한다.
 

전태일(1948~1970.11월)열사 묘소.

대구시 남산동에서 전상수와 이소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초등학교마저 중퇴, 16살에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업하고 이후에는 재단사로 일했다. 어린 여공들이 하루 14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권리와 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한 현실을 목격한다. 그가 찾아낸 것이 근로기준법이었다. 이렇게 좋은 선진적법이 있는데, 있는 줄도 모르고 일만하는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러나 청원과 진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정부의 감시는 겉치레였고 공장주들의 횡포는 여전했다. 1970년 10월, 시위를 계획했지만 실패한다. 11월 13일, 모든 시도가 좌절되자 절망에 빠진 전태일은 법전과 자신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불씨는 이렇게 피어났다.

이소선(1929~2011년)여사 묘소.

‘내가 못 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뤄달라’라는 아들의 유언대로 이소선은 노동자들의 어머니의 길로 나섰다.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그는 이후 노동자들의 근로시간 단축, 노동교실 유지, 민주노조 탄압에 대한 투쟁을 하다 1977년 투옥된다. 그리고 1980년에는 계엄령 위반으로 다시 옥고를 치룬다.전태일 평전을 읽은 노동자들이 분실과 자살을 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소선은 살아서 싸우고, 싸워서 바꾸자고 호소했다. 1998년에는 국회 앞에서 422일간의 천막농성을 이어갔다.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화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였다. 듣기 좋은 말만 한 것이 아니였다.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민주노총을 질타하기도 했다. 2011년 7월, 심장마비로 입원 중에도 노동자들을 격려하면서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최종길(1931~1973년)교수 묘소.

1973년 10월, 서울법대생들이 10월 유신 반대데모에 나섰고, 학생들은 체포·연행되었다. 교수회의에서 스승으로서 모른체 해서는 안된다는 발언을 했다. 발언 3일 후, 중정에 근무하던 동생과 자진출두하였으나, 3일 후인 10월 19일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중정차장 김치열은 최종길이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7층 건물에서 투신했다고 발표했다.

2002년 5월, 유족은 국가권력의 불법 가혹행위에 의해 최종길이 사망했다는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유족에게 18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국가권력이 서류를 조작하고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여 고문피해자를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은 소멸시효 완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부인 백경자는 2015년 임종 전에, 유산의 대부분을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갔다.

백기완(1932~2021년)선생 묘소.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기완은 1946년 부친을 따라 월남한다. 남북분단으로 어머니와 헤어지고 전쟁통에 형도 잃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자 거리와 현장에서 투쟁의 삶을 보내게 된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1974년 유신반대 운동으로 투옥. 19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투옥. 80Kg에 달하던 체중이 40Kg가 되도록 모진 고문도 당했다. 1986년 부천 성고문 폭로대회를 주도하다 또 투옥.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도 했지만, 이후 재야에서 통일과 노동운동에 진력한다. 독학으로 쌓은 해박한 지식은 등 다수의 소설과 수필집으로 간행된다. 대표적인 저항가요 의 작사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평생은 불의에 투쟁했던 운동가였다.

1.이소선 2.전태일 3.최종길 4.백기완 5.이애주 묘소

이애주는 1987년 민주항쟁 때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서 한풀이 춤을 추었다.

묘소의 개별적 감평은 생략한다. 붉은 선의 맥로가 이곳에 머물러 명당(혈)을 맺지 못하고 하단으로 진행하니 도처가 면배의 배(背)에 해당하는 곳이다.

김근태 의원과 소설가 김국태 묘소. 김근태 묘소만 있었는데, 형을 동생 곁으로 모셨다.

형제의 가족사는 파란만장했다. 열 번째로 태어난 김국태는 위로 여섯 남매는 일찍 잃었고, 세 형들은 6·25 때 행방불명됐다. 김근태는 막내였다. 그의 소설 은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되고 강제 징집당하는 동생 김근태의 이야기다. 김근태는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19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7년간의 도피생활을 해야했다. 김국태의 주량은 늘어만 갔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그의 말수는 줄어들었고, 동생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꼭 동생때문은 아니지만 김국태도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몸에 배어있었다. 1985년 김근태는 민추위 사건으로 구속되고, 끔찍한 고문을 당한 소식이 알려지자 김국태는 술에 의지하지 않고는 버틸수 없는 나날이었다. 90년대 접어들면서 김국태는 추계예술대 교수로 임용되고 김근태는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안정을 찾은 듯 했다. 그러나 형은 오랜 음주습관으로 2007년에, 동생은 도피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2011년 세상을 떠났다. (정규웅 글에서 발췌)

묘소 전면에서 올라오는 홍색선의 맥로가 1번은 위로 진행을 하고, 2번은 녹색원으로 표시한곳에 11회절의 명당을 결혈한다. 십 여년 전부터 김근태 의원을 이곳으로 이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좌로부터 유원호, 문익환 목사, 정경모 선생 부부 묘소.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자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에 간 것도 충격이었고, 김일성을 뜨껍게 껴안은 장면도 논란이 되었다. 훗날 북한측 안내원은 ‘남한에서 재야운동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대담하단 말인가’라며 놀라워 했다. 문목사의 방북에 동행했던 사람이 정경모와 유원호다. 정경모의 에는 40여 년간 망명객으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3인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하고 ‘4·2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훗날 6.15 남북공동선언에 10년 앞선 사건이었다.

앞산 넘너에서 출발한 홍선색의 맥로가 묘소 근처에 이르러 분지하여, 주혈은 중간에 있는 문익환 묘소에 12회절 명당을 맺고, 차혈은 청룡방의 정경모 묘소에 9회절 명당을 맺었다. 백호방의 유원호 묘소는 문익환 묘소의 여기(餘氣)에 자리하는 8회절 명당이다.

문목사 부부 묘소는 당초에는 건너편 대흉지에 자리했었다. 오랫동안 고생한 배우 문성근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윤치형(尹治衡, 1896~1970년)박사 묘소.

그는 한국인 최초 박사이자 의학박사였다.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경성의전(서울의대 전신)을 졸업, 일본 규슈대학 의학부, 독일 프레스라우 의대를 졸업한다. 1924년 규슈대학에서 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의 박사학위 취득은 ‘매일신보’에 크게 실릴 정도의 큰 경사였다. 금의환향하여 모교인 경성의전에서 교수가 된다.

묘소는 6회절 명당으로 후손들의 삶에도 풍수적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화교 여씨 묘소. 윤치형 박사 옆에 같은 해인 1970년에 모셨다.

아버지(顯考)는 여영성(呂永盛)이고 어머니(顯?)는 여모유태군(呂母劉太君)이라 적혀있다. 여씨의 자식을 낳았으니 여모(呂母)이고, 유(劉)는 모친의 성(姓)이며 태군(太君)은 돌아가신 어머니라는 뜻이다. 비문을 쓰는 방식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

여씨는 중국 산동성 황현(山東省 黃縣) 사람인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으로피란와서 살다가 이곳에 영면하였다. 묘소는 명당에 모셨으니 후손들도 한국에서 정착해잘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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