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레전드' 황선홍·김병지가 추억하는 밀당장인 히딩크[창간특집]

성남 | 황민국 기자 2022. 5.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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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미디어 상대할 땐 펄펄 뛰었지만
라커룸에선 선수들에 화낸적 없어
팀을 단단하게 하는 액션 능했던 명장

황선홍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난 9일 스포츠경향 창간 17주년을 맞아 경기 성남시 율동공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2002 한·일월드컵은 한국 축구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이전까지 본선에서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던 한국이 4강까지 오르면서 전국민을 웃고 울리는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20년의 세월이 덧대진 이 이야기는 모두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그때 그 추억은 최근 다시 화제를 모았다. 4강 신화의 주역인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53)이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한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되면서다. 홍 감독이 은퇴한 뒤 한·일월드컵 당시 스승인 거스 히딩크 전 감독(76)에게 러시아 안지에서 직접 지도자 수업까지 받은 사실과 맞물려 두 사람의 라커룸 리더십이 얼마나 흡사할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외부인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라 일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황선홍 23세 이하 축구대표팀 감독(54)과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52)은 지난 9일 성남시 율동공원에서 스포츠경향 창간 17주년을 기념해 만나 “우리 감독님이 라커룸에서 화를 냈던 기억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히딩크는 두 얼굴의 사나이
두 사람이 기억하는 히딩크 감독은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평소에는 인심 좋아보이는 아저씨처럼 온화하기 짝이 없다.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선수는 용서하지 않지만, 라커룸에선 좀처럼 큰 목소리를 내는 일이 없다.

김 부회장은 “감독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도 라커룸의 차분한 분위기는 기억에 남는다. 조용한 전략가였다. 후반 들어 전술에 변화를 줄 때도 고 핌 베어벡 코치나 박항서 선생님(현 베트남 감독)이 나섰던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황 감독도 “감독님이 (0-5로 대패한 프랑스전과 체코전에서도)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발대발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히딩크 감독이 반대편의 얼굴을 보여줄 땐 목적이 분명했다. 특히 그는 언론을 상대할 때 불같은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냈는데, 모두 선수단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나 마찬가지였다. 황 감독은 “우리 감독님은 선수단을 위해 싸운다는 이미지가 강했다”면서 “월드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최용수(현 강원FC 감독) 항명설이 나왔을 때 강하게 나선 것이 대표적인데, 팀을 단단하게 만드는 액션에 능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황선홍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난 9일 스포츠경향 창간 17주년을 맞아 경기 성남시 율동공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5.9/정지윤 선임기자


■히딩크는 시범케이스의 명수…“하필이면 내가 걸렸다”

히딩크 감독과 관련해 좋은 추억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불리고도 정작 한·일월드컵 본선에서 벤치에만 앉았던 김 부회장은 “지금도 밉다”며 원망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김 부회장은 2001년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하프라인까지 드리블을 하다가 공을 빼앗기면서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잃었다. 황 감독은 “그래도 한·일월드컵 엔트리에 뽑혔다는 게 대단하지 않느냐”고 위로했다.

김 부회장은 “생각해보면 감독님은 그야말로 밀당의 달인”이라면서 “내가 K리그에서 잘하니 대표팀에 계속 뽑아는 주시는데, 정작 대표팀에 가면 기회를 안 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를 떠올린 김 부회장은 자신이 ‘시범 케이스’에 걸린 것이라 말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일월드컵 성공 이후 호주(독일월드컵 16강)와 러시아(유로2008 4강)에서도 승승장구한 비결 가운데 하나가 말 안 듣는 베테랑 퇴출이었는데, 한국에선 자신의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다. 김 부회장이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머리 모양과 축구 스타일로 통통 튀는 반항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김 부회장은 “러시아에서 아르샤빈이 대표팀에서 퇴출되는 걸 보면서 내 생각이 났다”며 “요샌 박항서 감독님이 베트남에서 그렇게 하시더라. 이게 성공한 지도자의 비결인가 싶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2년 6월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을 마친뒤 히딩크감독이 이번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는 황선홍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연합뉴스


황 감독은 히딩크 감독식 베테랑 길들이기에 휘둘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황 감독 본인을 비롯해 홍 감독까지 주축 선수들이 1년 가까이 대표팀에서 자리를 비운 적이 있어서다. 황 감독은 “그나마 나는 일찍 부름을 받았지만, (홍)명보는 직전까지 안 뽑혔다. 박쌤(당시 박항서 코치)에게 찾아가 ‘명보가 필요하다’고 하소연하니 마지막에 뽑더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명보형이 뽑힌 그 날에 같이 파주트레이닝센터로 간 사람이 나”라면서 “명보형이 택시 안에서 ‘병지야 마지막이다. 아무 소리 말고 열심히 하자’고 당부했던 게 기억에 난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의 마음 깊이 남은 상처에는 터키와 한·일월드컵 3~4위전 결장도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승패가 큰 의미가 없는 축제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때까지 자신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한·일월드컵 20주년을 기념해 방한 예정인 히딩크 감독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젠 결자해지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회장은 “3년 전에 만날 때도 ‘밉다’고 말했어요. 이번에도 만나면 또 그러겠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골키퍼 김병지가 45살에 은퇴할 때까지 현역 최고의 골키퍼로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라 고맙기도 합니다”고 말했다.

성남 |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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