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없어 남용 없다?..현직 판사의 '임성근 무죄' 대법원 비판

한겨레 2022. 5. 16.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고]수석부장은 '없는 권한'을 남용했을까?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달 28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임 수석부장은 2015년,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관한 추측성 기사를 써 재판에 넘겨진 가토 다쓰야 전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 쌍용차 집회 과정 중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 체포치상 혐의 재판,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선수들 원정도박 사건 재판 등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과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연합뉴스

[기고] 양경승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공무원이 법령에 의해 부여된 일을 하는 데는 일정한 권한이 필요한바, 우리는 그것을 직권이라고 부른다. 공무원이 직권을 행사하는 데는 일정한 요건이 필요하다.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수단과 방법이 적법해야 하며, 절차도 법령에 따라야 한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타인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그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면 5년 이하 징역 처벌을 받게 된다. 이른바 직권남용죄다.

그런데 실제 직권남용죄를 묻는 일은 쉽지 않다. 직권이 아니라 상급자라는 지위에 기대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그 영향력의 원천이 직권인지, 지위인지 판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만약 피의자를 소환해 신문하던 경찰이 피의자를 고문하거나 진술을 강요한 경우, 경찰에게 주어지지 않은 고문권이나 진술강요권을 남용한 게 아니라 경찰에게 주어진 권한인 피의자신문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검찰청 수위가 피의자를 불러서 조사했을 경우는 직권남용죄 적용이 불가능하다. 법은 처음부터 그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하지도, 그 권한이 제대로 사용되기를 기대한 바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은 판사들의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해 직권을 남용한 혐의로 기소된 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에게 애당초 그럴 직권이 없어 직권남용죄를 물을 수 없다며 무죄 판결했다. 이 판단은 그 기본방향에서는 지극히 옳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시청 인사국장이 건축과 하급자를 불러서 “당신, 승진 안 할 거야? 내가 부탁한 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며 자신의 친인척에게 건축허가를 내주도록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는 논리적으로 직권남용죄를 물을 수 없다. 인사평가에서 부당하게 낮은 평점을 줬다면 몰라도, 건축허가는 인사국장 업무가 아니어서 허가를 지시할 권한(직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직권의 남용과 지위의 남용을 혼동해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04도2899 판결).

반면에 수석부장 사건은 어떤가. 수석부장은 판사들에게 법정에서 특정한 발언을 하고, 판결 선고 때 특정한 내용을 고지하고, 판결문을 수정하라고 요구·지시했다. 검찰은 직권을 남용하여 타인(판사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다며 기소했고, 1심과 2심은 재판개입은 위헌적이고 위법한 행위지만 수석부장에게는 그럴 직권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이 논리대로 무죄를 확정했다.

하지만 법원장을 보좌하는 수석부장은 △사건배당 △대법원 등 상급기관 보고 △법관 근무평정 △법관 사무분담 등과 관련해 판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거나, 지시하거나, 협조를 구하거나, 필요한 정보 제공을 요구할 권한(직권)이 있다. 따라서 수석부장이 특정 사건 담당 판사들에게 부당한 지시나 요구를 한 것은, 사법행정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그 목적과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

대법원은 무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을 든다. ‘직권남용죄를 묻기 위해서는 구체화된 권리의 현실적인 행사가 방해돼야 하는데, 판사들은 재판부 내부 논의와 합의를 거치거나 동료 판사들 의견을 구한 다음 자신의 판단과 책임 아래 재판권을 행사했다. 판사들은 수석부장의 요청을 지시가 아닌 권유나 권고로 받아들였다. 판사들의 행위는 법령이나 직무수행상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등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논리다. 당초 일처리를 잘못한 판사들이 반성적 차원에서 수석부장의 지시를 수용한 게 아니라, 수석부장의 지시라 마지못해 따른 것으로 보는 게 옳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당하게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누구나, 어떤 사건이나 공평하게 처리돼야 하는 것 역시 법치국가와 민주국가의 기본원리다. 대법원은 앞서 언급한 인사국장 사례는 물론, 공무원이 자신의 본래 직무와 관련해 권한을 행사한 경우 예외없이 유죄를 인정해왔다(대법원 2004도4044 판결, 2011도1739 판결). 일본 최고재판소 역시 형무소장에게 수형인 자료 열람·제공을 요구해 제공받은 판사의 직권남용죄를 인정했다(일본 최고재판소 쇼와55년 461 판결). 수석부장의 행위가 본질적인 재판 왜곡으로 이어지지 않은 만큼 관대한 처벌이 마땅하지만, 직권남용죄에 쉽게 무죄 판단이 내려진 점은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