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봄빛 붉은 어느 날에

김정화 문학평론가 2022. 5.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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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등에서 햇미역 냄새가 나는 듯 비릿하다. 반백의 생을 정리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간한 그의 책이 쌓아 올린 책 탑 중간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얼마 만인가.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같은 해에 같은 잡지에 등단했고 이웃에 살았으니 다른 문우들보다 각별했다. 선한 눈매와 나직한 음성만으로는 전혀 억센 바다 사나이였다고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책 발간을 축하한다는 전화를 내었을 때 “시답잖은 글로 가만히 있는 바다를 팔려 바다에 미안하다”던 조곤조곤한 음성을 기억한다.

바다를 늘 우러르던 사람이었다. 풀에게 나무에게 강에게 바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본 적 없고, 사람에게조차 제때 사과의 박자를 놓치기 일쑤였던 나로서는 그의 겸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언제나 바다가 펼쳐져 있는 삶이었다. 그가 바다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기사 출신으로 이십 대 때 칠 년간 배를 타고 대양과 대주를 항해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국 경험을 했고 이십여 년 동안 해양 잡지를 만들면서 바다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천생 바다의 소생이라 여겼다. 바닷가에만 서면 심장이 팔딱거린다고 했다. 그가 만난 바다는 다채로웠다. 바윗돌을 물살로 보듬고서 꿈쩍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바다, 하늘 새에게 길을 터주어 쉬어가게 하고 산 그림자 내리면 말갛게 씻어주는 묵언의 바다, 물과 바람과 세월의 소리를 담은 여여한 바다, 달과 소통하고 바람길을 만들며 격정의 파도를 넘는 바다, 세파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까지 다독이는 바다. 그리고 생존의 바다, 그림 속의 바다, 내려다보는 바다, 잊히지 않는 바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바다가 그가 되고 그가 바다가 됐다.

삶과 죽음이 겹쳐 있는 그의 바다를 읽는다. 선상 생활 중 가슴 무너졌을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적도 근처 해안에서 들려온 “사람이 빠졌다”는 다급한 목소리에 심장은 곤두박질쳤을 것이며, 순직 선원 위령제 앞에서 흐느끼던 젊은 부인의 울음소리는 해조음으로 바스락거리며 가슴 붙박이가 됐을 터. 결국,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생명을 탄생시키는 원천의 바다가 되는 것일까. 그가 체험한 바다는 한낱 감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한낮의 푸른 바다는 모성이며 해 질 녘 바다는 아늑한 자궁이다. 생명의 근원이고 영원과 소멸과 재생을 나타내는 소우주이며, 육지의 끝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젠가 그가 작고 수필가 김소운 선생의 문학비를 안내해 준 적이 있다. 영도구청 앞 쌈지공원의 문학비 뒤로 부산항이 넓게 펼쳐졌다. 그날, 그는 한때의 짧은 선원 생활을 한 것을 두고 “나는 바다밖에 모른다”고 우쭐대고 다닌 점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오대양을 누비며 길고 험난한 항해를 경험한 자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신이 겪은 바다는 천변만화하는 바다의 작은 등대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긴 것이다. 섬과 섬 사이로 솟은 붉은 등대 하나가 유독 쓸쓸해 보였다. 나는 등대를 배경으로 참갈파래색 남방을 입은 그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등대지기가 되고 싶어요.” 혼잣말처럼 되뇌던 목소리에서 밀려가는 썰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글 중 ‘돌아온 배’는 오랫동안 내 눈을 옭매었다.

육지로 돌아온 노(老)선장이 사십여 년간 함께 항해하던 분신 같은 배를 자신의 고향에 정착시킨 사연이다. 선장은 배와 함께 세월을 버텼고 배는 선장을 의지한 채 기나긴 험로를 이겨내었다. 배가 오랜 항해를 마친 영광의 정박선이 돼 모항으로 귀향한 것처럼, 천지가 꽃불로 활활 타던 봄빛 붉은 어느 날에 그는 영영 바다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허망하게 수필가 한 사람을 잃어버린 9년 전, 그해 봄은 그와 함께 떨어진 꽃잎도 아까웠다.


그리해 독자들이여, 물빛 같은 웃음을 머금던 그를 행여 잊었다 하더라도, 돌아온 이 봄날에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해양 수필집, 김동규의 ‘바다의 기억’을 다시 한번 기억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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