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가

김동헌 온종합병원장 2022. 5.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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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영양 유지는 인체의 정상 기능, 성장, 질병의 예방·회복에 필수적 요소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제 식민지배, 한국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먹고 사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왔다. 서민 대부분은 “아이야 배 꺼진다 뛰지 마라!”하고 지청구를 늘어놓듯 배고픔에 시달려왔다. 산업화 사회, 우리나라가 경제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사회 환경과 국민의 영양 상태가 개선됐다. 영양 결핍의 시대가 오히려 영양 과잉의 시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영양 과잉의 시대에도 입원 환자의 30% 정도가 영양 결핍 상태에 놓여 있다. 영양 결핍은 환자의 회복에 나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치료 후 합병증과 사망률을 높인다. 특히 장이 막히거나, 병 때문에 장을 대부분 잘라내고, 수술 후 장의 내용물이 피부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장 피부 누공증 환자는 입으로 음식물을 전혀 섭취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에는 정맥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하는 경정맥 고영양 수액 요법(IVH)으로 영양을 공급한다.

입으로 먹지 못하는 환자에게 경정맥 고영양 수액 요법을 고안한 사람은 1968년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 외과 교수인 스탠리 두드릭이다. 사람이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가 오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보편적 진리였으나, 두드릭이 고 영양수액을 인체의 중심 정맥인 대정맥에 관을 넣어 서서히 주입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이것은 물의 양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전해질 미량 원소 비타민 등을 인체에 필요한 만큼 인위적으로 계산해서 주입하는 요법으로, 사람이 먹지 않고도 장기간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드릭이 처음 보고했다. 이런 연구 결과는 수술 후 장이 막히거나 장이 지나치게 짧은 환자, 수술 후 장이 새는 장 피부 누공증 환자, 장에 만성질환이 있어 먹어도 흡수가 잘 되지 않는 환자, 항암치료 도중에 오심과 구토 등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환자 등에게 희소식이었고, 높은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켰다.

생물학과를 졸업한 두드릭 교수는 대학에서 토양의 마그네슘양이 토마토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의대에 입학한 그는 같은 대학의 외과 교수가 돼 영양 결핍이 수술 후 경과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에 문제가 있어 먹지 못하는 환자는 사망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 이의 개선책으로 중심 정맥(대정맥)에 주사를 놓아 고영양 수액을 공급하는 경정맥 고영양 수액요법을 생각해냈다. 임상 적용에 앞서 그는 실험 개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주사만을 이용해서 수개월을 생존,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두드릭은 이 고영양 수액법을 사람에게 적용함으로써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1968년 학술지에 발표했다. 두드릭의 고영양 수액법은 리스트의 소독법,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마취법의 발견 등과 어깨를 겨루는 현대의학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먹지 않고도 주사를 통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드릭이 증명해낸 셈이다.

1986년 장을 절제한 후 합병증으로 생기는 장피부 누공증, 불가피하게 장을 너무 많이 절제해 생기는 단장(短腸) 증후군 등의 환자에게 필자도 이 고영양 수액법을 적용·치료했더니 종전 30%에 이르던 사망률이 1, 2%로 크게 개선된 사실을 확인하고, 2년 뒤인 1988년 대한외과학회에 보고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병원에서 영양지원팀을 조직해 환자 개개인에 대한 영양 상태의 평가, 영양지원의 방식, 영양지원의 양, 영양지원의 종류 등을 평가하고 지원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온종합병원에서도 내·외과 의사 영양사 간호사 약사 등으로 영양지원팀을 구성해 활발한 영양지원을 통한 환자회복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현대의학의 획기적 발견이라는 평가를 받는 경정맥 고영양 수액 요법도 단점은 있다. 첫째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거다. 우리가 아무리 비싼 음식을 사먹는 데도, 주사로 영양을 공급하는 비용의 10분의 1도 들지 않는다. 합병증으로 생기는 감염 기흉 대사 이상 고혈당증 저혈당증 간 기능 장애 전해질 이상 등도 무시할 수 없는 단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자연의 섭리대로 입으로 먹는 것이, 맛을 즐기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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