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볕멍
[경향신문]
저 황홀, 눈이 멀게 환한, 생이 녹도록 따뜻한
저 찬란, 눈부시게 느슨한 생의 밀도 내려놓고
저 뭉클, 촘촘한 볕의 농도에 홀려도 좋을까
씹어야 할 고통의 지분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우수는 멍하니 춘수에 넋 놓아도 좋은 것일까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으려 겨우내 악물었을까
치통은 최선을 다해 조금 더 욱신거려도 좋을까
최정란(1961~)
대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놀멍, 물멍, 불멍 등이 유행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는 ‘멍때리다’는 말이 아름다운 풍경을 상징하는 명사와 결합하면서 심리적 안정과 휴식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놀멍’은 노을을, ‘물멍’은 물을, ‘불멍’은 불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멍’은 바라보지만 보지 않는 것, 생각을 유보하거나 멈춰 긴장된 몸과 마음에 이완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한데 ‘볕멍’은 쥐구멍의 볕처럼 옹색하기만 하다. 애잔한 마음마저 든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볕이라 “눈이 멀” 만큼 황홀하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한 햇볕이 “느슨한 생”에 희망을 준다. 따스한 기운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촘촘한 볕의 농도”에 홀려도 좋겠지만 ‘멍’은 잠시 대상을 흐리게 할 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씹어야 할 고통”을 상기하는 순간 ‘멍’은 사라지고 어두운 현실과 마주한다.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는다는 말에선 겨우내 이 악물고 견딘 아픈 사연이 만져진다. 잠시 맛본 황홀과 찬란, 뭉클은 독약과도 같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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