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기억의 언덕, 절두산 순교성지

한겨레 2022. 5. 1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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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한강변 언덕의 절두산 순교성지. 임형남 그림

[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노은주·임형남 | 가온건축 공동대표

멋진 재료와 외관을 가지고 있고 기능적으로 잘 작동한다면 좋은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에 담은 생각과 주변의 조화일 것이다. 건축물은 땅 위에 세운다. 그러기에 건축물에 자리를 내어준 자연과의 조화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짓다 보면 과시하고 싶어지고 결국 ‘자의식 과잉’ 건축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건물은 결국 주변과 불화하며 조화롭지 못한 건축물이 돼버린다.

가끔 건축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건축물 선호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다. 그때, 역시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자연처럼 된 건축물이 대부분 앞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건축물은 대부분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며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이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다. 민의의 전당이며 한 나라의 대표적인 공공건축물인 국회의사당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무척 씁쓸하다. 원인이 무엇일까? 우람한 돔으로 지붕을 덮고 육중한 열주가 외부를 둘러싼 그 건축물에는 국회의 역할에 대한 어떤 생각도, 국민에 대한 선의도 보이지 않는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권위’뿐이다. 그런데 국회의사당에서 북서쪽 한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그와 반대되는 건물이 보인다. 양화진 들머리에 고개를 들고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인 절두산이 있는데, 그 위에 만들어진 건물인 갓을 쓴 모습의 절두산 순교성지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는 절두산이 세종대에 가을두(加乙頭)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의미는 우리말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말한다. 얼마 전까지도 근처에 살던 분들은 ‘덜머리’로 불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잠두봉, 용두봉으로도 나온다. 누에가 머리를 들었다거나 용이 머리를 든 형상으로 인식해 그런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북한산의 지맥이 인왕산, 안산, 와우산을 거쳐 한강에 도착할 무렵, 땅의 흐름이 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리를 들어 생각에 잠긴 듯하다. 그런 명상적인 풍경은 특히 석양이 곱게 강을 물들일 무렵 바라보면 아름답다. 그 풍경은 지금도 아름답지만, 오래전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을 꼭 보여주었다고 한다. 유난히 물이 맑고 백구(갈매기)가 많아, 시인 묵객들도 자주 찾아 경치를 즐기는 곳이었다. 특히 눈이 올 때 경치가 아주 좋아 ‘양화진의 눈 오는 풍경’(양화답설)은 서울 십대 경승지(십영)에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는 처절한 비극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병인박해(1866년) 때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됐다. 대원군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물길로 들어왔던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몇년에 걸쳐 무려 8천여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교인들을 참수하고 물에 던졌으니, ‘머리를 자른 산’,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아프고 처절한 순교의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아름다운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에 맞춰 그곳에 순교성지를 조성하는 사업이 시작됐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1966년 3월 착공해 19개월 뒤인 1967년 10월 완공됐다. 당시 한강에 바로 붙어 있는 언덕이었던 절두산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산 아래로는 모래톱과 강이 이어져 있었다.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주변 토지를 정비해 터를 잡고, 사업의 핵심이 되는 순교기념관과 성당의 건립을 위한 설계공모가 진행됐다. ‘산의 모양은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가 설계 조건으로 제시됐다.

공모 결과 건축가 이희태의 설계안이 당선됐다. 갓을 쓴, 혹은 초가지붕을 연상시키는 곡면의 지붕 아래 기둥과 보의 형상을 갖춘 당선안은 전통건축을 현대의 건축으로 번안한 모습이었다. 순교의 상징인 언덕에 대한 기억과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던 초기 교인들의 마음이 그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설계안은 땅의 형상에 아주 적합했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마치 절두산, 아니 한강에 이르러 고개를 들고 명상에 잠긴 잠두봉에 시간이 서서히 쌓여 수북해진 듯 자연스럽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희생돼야 했던 초기 천주교도들의 처절함이 느껴진다.

병인박해 이후 150년, 성지로 조성된 지 50년이 넘었다. 고적하던 모래톱은 빨리 달리는 차들로 가득 찬 도로로 바뀌었고 주변은 건물로 가득하지만, 오랜 기억을 담고 있는 절두산은 시간과 기억이 퇴적되며 단단하게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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