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의 '얼씨구' 잊지 못해 20년째 창작 판소리 만들죠"

강성만 2022. 5. 1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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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소리꾼 최용석 전 바닥소리 대표
최용석 전 바닥소리 대표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지난 20년 꾸준히 창작판소리를 만들고 공연해온 최용석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전 대표에게는 사회참여 예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가 꼭 20년 전에 판소리명창 고 성우향 선생 제자들과 함께 만든 전문공연단체 이름을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로 지은 것도 “밑바닥 사람들 소리를 내주는 것이 판소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2002년부터 3년 전까지 이 단체 대표를 지내며 통일의 꿈을 이야기한 <닭들의 꿈, 날다>,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닥터 2478> 등 사회성 짙은 창작판소리와 소리극을 만들었다. 5·18을 주제로 2014년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1인 창작판소리극 <방탄철가방-배달의 신이 된 사나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는 2020년 올해의 레퍼토리 전통예술 부문에도 뽑혔다. 2019년에는 장편 <불멸의 이순신>을 쓴 김탁환 소설가와 협업해 국내 첫 웹판소리극 <달문, 한없이 좋은 사람>을 만들어 지난해 말 초연했다.

올해 들어 코로나 팬데믹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공연과 연출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소리꾼 최 전 대표를 지난 10일 그가 월급쟁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서울 테헤란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구내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5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카페를 열어 공연도 꾸준히 하며 지역 문화명소로 일궜으나 지난해 주변에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카페가 6개나 생기는 바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단다.

그가 대본과 연출을 맡은 어린이 국악극 <인어공주 황옥>은 어린이날을 맞아 지난 5일부터 사흘 동안 국립부산국악원 무대에 올랐는데 4회 공연 모두 300석 좌석이 꽉 찼단다. 부산 동백섬 인어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 역시 ‘해양 환경 보호’라는 묵직한 생태 메시지를 담았다.

지난해 말 초연한 <달문, 한없이 좋은 사람>의 한 장면. 최용석 전 대표 제공

오는 7월에는 진도 국립남도국악원에서 <달문, 한없이 좋은 사람> 초청공연을 하고 그 두 달 뒤에는 서울돈화문국악당과 공동기획으로 <방탄철가방-배달의 신이 된 사나이> 공연도 할 계획이다. <방탄철가방-배달의 신이 된 사나이>는 출중한 자전거 타기 실력으로 광주 지역 짜장면 배달계의 최고 고수가 된 최배달의 시선으로 광주민중학생의 역사성과 비극성을 살핀 작품이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그는 중학 시절 선배들을 따라 판소리북을 배우면서 처음 판소리를 만났다. 중앙대 한국음악과를 나온 2000년부터 2년 동안 판소리 스승 고 성우향 선생의 조수 노릇도 했단다. 그는 소리를 처음 배울 때부터 창작판소리가 꿈이었다고 했다. “임진택 선생의 창작판소리 <5월 광주>(1990년 초연)에서 큰 영감을 받았죠. 판소리의 매력은 이야기이고 또 판소리는 동시대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저에게 심어준 작품입니다. 저는 임진택 키즈이죠.”

창작판소리를 한다면 첫 작품은 5월 광주를 다룰 것이라는 생각도 소리 공부 초기부터 했단다. 그의 창작판소리에 담긴 강한 사회의식의 뿌리는 뭘까? “유치원 나이에 5월 광주를 목격했어요. 제 주변 어른들은 5공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죠. 초중고를 다니며 5월마다 끓어오르는 남도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죠.” 목포 홍일중 3학년 때는 당시 노태우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 맞서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학교 친구들과 어깨를 걸고 교문 밖 시위까지 했단다. “시위 때 학생들 주장을 담은 전단을 제가 만들어 뿌리기도 했죠.”

고 성우향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려고 1993년에 들어간 중앙대 한국음악과도 그의 창작판소리 인생에 든든한 뒷배였다.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이 한 학기에 한 번 발표하는데요. 친구들은 대부분 전통 판소리를 했는데 저는 임진택 <5월 광주>를 발표했어요. 혼이 날 수도 있다고 걱정했는데 오히려 당시 해금 전임 교수였던 최태현 교수님이 ‘네가 이 일을 꾸준히 하면 좋겠다’고 격려까지 해주셨죠. 학과 분위기가 무척 자유로웠어요. 25현 개량 가야금을 앞서 연주에 활용하는 등 음악 형식적으로도 진보적이었죠.”

2002년 고 성우향 명창 제자들과
‘바닥소리’ 만들어 17년 이끌어
창작판소리·국악극 등 20여편 창작
김탁환 작가와 첫 웹판소리극 제작
5·18 1인판소리극 ‘방탄철가방’도

“밑바닥 삶 소리 내는 게 판소리”
6년째 바리스타의 삶도

그가 17년을 이끈 바닥소리에도 국악인 박애리, 영화 <귀향>을 만든 조정래 감독 등 중앙대 선후배들이 여럿 참여했다. 국악계의 진보적인 공연단체가 왜 성우향 명창 제자들로 꾸려졌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성 선생님은 자유로운 분이었다. 제자들이 바닥소리를 만들자 초기에는 선생님이 운영하던 학원을 연습 공간으로 내주었다”고 말했다.

<방탄철가방-배달의 신이 된 사나이>의 한 장면. 최용석 전 대표 제공

그는 김탁환 작가와 <달문, 한없이 좋은 사람>을 포함해 소리극 <가시리>, 어린이극 <왕대의 모험> 등 세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3년 전에는 김 작가와 창작집단 ‘싸목싸목’(천천히라는 뜻의 호남 사투리)을 만들어 사업자 등록까지 했다. “김 작가 원작영화 시사회 때 제가 김 작가 팬이라고 인사를 한 뒤 인연이 이어졌어요. 그 뒤로 김 작가가 제 카페를 자주 찾아 힘을 주었죠. 긴호흡으로 차근차근 작품 활동을 하자는 마음으로 싸목싸목이라고 했죠.”

지금껏 창작판소리 10편과 1인 판소리극 2편, 국악극 10편을 만들었다는 최 대표에게 왜 판소리는 바닥소리인지 물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 삶의 한복판이 바닥이며 그것이 바로 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바닥소리가 판소리이고 판소리는 사람들의 삶 한복판을 이야기하는 소리이죠. 가난하고 차별받아 억울하고, 소외받아서 우는 사람들의 소리를 판소리에 담아서 소리하는 게 판소리꾼들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죠.”

그가 3년 전에 건강 이상을 느끼고 나온 바닥소리의 사회 비판적 정신을 계속 유지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바닥소리 단원들은 처음부터 단체 기본 방향에 동의하고 들어와요. 제가 떠난 뒤에도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태일> 등 사회 참여적 작품들을 계속 만들고 있어요. 선배로서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작년에는 한국방송 국악대상 단체상도 받았어요.” 이런 말도 했다. “최근 국악계를 보면 국악의 형식적 확장이 이뤄지고 있어요.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죠. 거기에 더해 사람들의 소소한 삶을 노래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삶을 담아가며 국악이 우리 삶에 풍성하게 뿌리내리길 기대하고 저도 애쓰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판소리의 즐거움이 뭔지 물었다. “좋은 소리와 좋은 문학(사설)이 만났을 때 객석에서 얼씨구 소리가 들립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거죠. 좋은 소리꾼은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성우향 선생님은 판소리는 영화 같다고 했죠. 소리꾼은 이걸 잘하려고 부단히 수련합니다.”

앞으로 꿈을 묻자 그는 “지금껏 계속 꿈대로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버티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가족들 건사하면서 일 그만두지 않고 내 이야기로 내 소리를 하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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