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 6살 아이에게 "다시 법정에서 진술하라"고 했다

박고은 2022. 5. 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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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위헌 결정 '2차 피해 우려' 현실화
영상녹화 진술했는데, 다시 법정 출석
신고 포기하고, 사건처리 속도 늦어져
항소심 유죄, 파기환송 되는 사례 속속
"정부·국회, 대안입법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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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ㄱ(17)씨는 지난해 말 영상녹화 진술을 했는데도 3월 다시 법정에 나서야 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12월23일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30조6항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영향이다. ㄱ씨는 법정에 선 뒤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의료지원을 받고 있다. 피해 경험을 법정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다시 진술하느라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15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영상녹화 진술까지 마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가 다시 법정에 불려 다니는가 하면, 법정에 서는 것을 우려해 신고를 주저하는 사례도 있다. 최근 ‘헌재의 위헌 결정을 하급심 재판에 소급 적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도 나와 2차 피해 사례는 빠르게 늘 것으로 보인다.

피해 신고까지 꺼리게 한 헌재 결정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지난 8일 13살 미만 피해자의 신체를 만진 혐의 등으로 기소된 ㄴ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위헌 선언된 성폭력처벌법 규정 등의 위헌성에 대한 고려 없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설명했다. 부산고법은 지난해 10월 성폭력처벌법 제30조6항에 따라 피해자 진술과 조사 과정을 촬영한 영상물을 중요한 증거로 삼아 피고인의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피해자는 ㄱ씨처럼 법정에 나가 다시 피해 진술을 하고, 피고 쪽 반대신문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한겨레>에 “이번 대법원 판단에 따라 1·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다른 피고인들도 반대신문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을 법원에 피력하지 않겠나. 항소심까지 선고된 사건의 경우 파기환송되는 건들이 앞으로 꽤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피해자와 보호자의 불안은 커지고 있다. 지난 1월 검찰은 3살 때 성범죄 피해를 입었던 한 6살 어린이에게 법정 진술을 요청했다. 영상녹화 진술을 했지만, 헌재 결정이 영향을 미쳤다. 피해자 부모는 아이가 피해 사실을 반복 진술하고 법정에 세우는 것이 아이에게 괜찮을지 병원, 상담기관 등을 오가며 문의하고 있다. 미성년 피해자 지원단체에도 문의가 잇따른다. 정희진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상담팀장은 “아이가 정말 법정에 서야 하는 건지, 몇번이나 피해 사실을 진술해야 하는지 등 재판 과정을 우려하는 부모들의 상담이 늘고 있다”고 했다. 서혜진 변호사는 “법정에 나가야 한다는 말에 신고를 포기하는 분들도 많다. 과거에도 피해 경험 반복 진술 등의 이유로 보호자가 신고를 망설이는 사례가 있었지만 위헌 결정 뒤 이런 사례가 더 늘었다.”고 했다.

수사기관이나 재판부의 부담도 늘었다. 6살 어린이 피해자의 경우 고소한 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검찰에선 기소조차 못하고 있다. 원고 쪽 오선희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는 <한겨레>에 “검찰 쪽도 아이가 답변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등의 걱정으로 고민이 길어지고 있다. 헌재의 결정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결코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희진 팀장은 “최근 미성년 피해자를 법정에 불렀던 판사가 직접 (단체에) 연락을 해왔다. ‘조심스럽게 진행한다고 했는데도 아이가 많이 힘들어했다’면서 피해자의 상태를 물었다. 재판부에서도 부담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고 했다.

판사의 연락 “진술한 아이는 괜찮나요?”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에겐 신속한 대안 입법이 절실한 상황이다. 법무부는 지난달 14일 아동 친화적 증거보전 절차 특례를 신설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미성년 피해자는 아동 친화적인 별도의 장소에서 훈련된 전문 조사관에게 진술하고 판사와 소송 관계인들은 법정에서 영상 중계로 그 과정을 참관하도록 했다. 피고인의 변호인은 조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질문하게 했다. 여성가족부와 법원행정처는 지난달 11일부터 희망자를 대상으로 법정·피고인 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8개 해바라기센터에서 중계 장치를 활용해 증언할 수 있게 한 ‘영상증인신문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시범사업 뒤 보완을 거쳐 5월 중 전국 39개 해바라기센터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오선희 변호사는 “무엇보다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은 훈련된 아동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피고 측 변호인의 공격성·괴롭힘성 질문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대안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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