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기 맞은 'K문학' 1세대 피천득 "정치인 되려면 詩 읽어라"

공성윤 기자 입력 2022. 5. 1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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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문학전집 펴낸 그의 마지막 제자 정정호 교수.."살아계신다면 번역상 받아 마땅한 분"

(시사저널=공성윤 기자)

시(詩)를 읽지 않는 시대다. 대신 시대의 공백은 정치가 메우고 있다. 정파와 이념의 끊임없는 충돌이 이목을 잡아끄는 작금의 세태. 낭만과 사색을 요구하는 시는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정치인이 되려면 반드시 시를 읽어야 한다." 금아(琴兒) 피천득(1910~2007)의 말이다. 이에 대해 피천득의 마지막 제자인 정정호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74)가 설명을 덧붙였다. "시에는 인간의 욕망이나 죄악이 모두 망라돼 있어요. 즉 시를 읽음으로써 이런 것들을 경계하게 되고 조금 더 정의에 눈뜨게 되는 것이죠. 동시에 마음이 열리고 타자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정치의 시대에는 시를 읽는 정치인이 없는 것 같네요."

공자의 문학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무사(思無邪)'로 정리할 수 있다.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란 기능을 언급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정화되고 나쁜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갈등과 번목이 만연한 바로 지금 피천득 선생의 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5월6일 서울 마포의 한 커피랩에서 만난 정정호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시사저널 이종현

'아웃사이더' 작가의 진가 확인할 전집

정 교수는 최근 피천득 서거 15주기를 맞이해 그의 작품을 모두 엮은 문학전집을 펴냈다. 총 7권으로 이뤄진 전집에는 피천득의 시와 수필이 100편 정도 수록됐다. 또 산문과 번역문학도 총망라돼 있다. 5월6일 서울 마포구 한 커피랩에서 만난 정 교수는 "피천득 선생이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글을 최대한 다 찾아 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중에는 선생 본인이 모르는 작품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했는지 공개하지 않은 글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피천득의 삶과 문학관을 여과 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료인 셈이다. 정 교수는 "한국 문학계에서 소위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던 선생의 진가를 재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 자료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 왜 피천득이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다는 걸까. 정 교수는 "선생은 전업 작가가 아닌 데다 몸이 허약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았다"며 "글이 너무 순진하고 사회 변혁에 무심하다는 비평도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키 155cm로 왜소했던 피천득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란 국가적 위기를 헤쳐나온 문인이다. 하지만 동시대를 겪은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등이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하면 조명이 덜 비춰진 측면이 있다. 당장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수필 《인연》을 제외하면 피천득의 작품이 잘 언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 교수는 "선생은 열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고 망국민으로 살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며 "저항정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일제와 군사정권에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저항정신이 녹아있는 작품도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1932년 잡지 '동광'에 실렸던 시 《불을 질러라》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

시든 풀잎은 살라 버려라!

죽은 풀에 불이 붙으면

희노란 언덕이 밝갛게 탄다.

봄 와서 옛터에 속닢이 나면

불탄 벌판이 파랗게 된다.

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

시든 풀잎은 살라 버려라!

고(故) 피천득 ⓒ뉴스뱅크

"정쟁에 찌든 속세에 던지는 메시지"

정 교수는 "선생은 이 작품이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느낀 탓인지 본인의 문집 어디에도 이 시를 싣지 않았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피천득은 해당 시에서 척박한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마른 잔디'와 '시든 풀잎'을 모두 태워버리자고 소리친다. 차라리 모두 태워버려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어떻게 보면 정쟁에 찌든 속세에 던지는 저항의 메시지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그 밖에 피천득은 금쪽같은 번역작품도 적잖이 남겼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 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이 바로 피천득이 국내 최초로 번역한 작품이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피천득은 춘원(春園) 이광수 집에 살며 일찍이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이후 1946년부터 서울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정 교수는 "한국은 번역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측면이 있는데, 번역작품도 굉장히 중요한 문학 장르"라며 "선생은 자연스럽게 의역을 구사해 번역작품이 마치 원래 한글로 쓰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다.

최근 한국 소설이 세계 문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우선 한강이 2016년 《채식주의자》로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맨부커상' 국제상을 받았다. 이어 정보라의 2017년 작품 《저주토끼》가 올해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K팝과 K드라마에 이어 소위 'K문학' 전성시대다. 정 교수는 "선생은 1세대 K문학가"라며 "지금 살아 계신다면 번역문학상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피천득은 한국 문학을 외국에 알리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 시를 영어로 많이 번역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김소월의 《진달래꽃》, 박목월의 《나그네》 등이 그의 손에서 영어로 재탄생했다. 정 교수는 "선생의 번역은 영문학자나 교수로서보다 한국어의 혼과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토착적 한국 시인으로서의 번역"이라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5월26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피천득 문학에 대한 세미나를 연다. 5월은 피천득이 세상에 나고 떠난 달이고, 장소는 피천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피천득이 문학자의 꿈을 키운 학교가 1920년대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세미나 소식을 전하며 "수업 시간에 낭송을 하며 시의 생명력을 느끼도록 한 선생의 강의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떠올렸다. 그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피천득의 모습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소년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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