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만 있고 집은 없는 '이주노동자 대책'
[경향신문]
‘비닐하우스 사망’ 후에도 여전히 가건물 사용
열대몬순기후의 나라 캄보디아 출신 누온 속헹(Nuon Sokkheng)에게 한국의 겨울밤은 춥고 길기만 했다. 그는 2016년 봄, 스물여섯에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왔다. 2021년 1월이면 제도가 허용하는 4년 10개월의 기간을 채울 예정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일찌감치 끊어 놓았다. 고향의 대기가 덥고 습하다 한들 한국의 외딴 농장 한여름 비닐하우스 일터보다는 안락할 터였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의 꿈과 미래와 맞바꾼 자신의 꿈이 머나먼 타국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고된 노동으로 몸 여기저기가 비명을 지르고 알량한 비닐하우스 숙소에 몸을 누일지언정 군소리 없이 일해왔다. 고용주에게 순순한 일꾼이어야만 귀국해 가족과 해후한 후 다시 코리아로 돌아와 고용허가제로 4년 10개월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들판과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비닐하우스에서 살았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동짓달 밤, 유일한 난방장치였던 전기 패널조차 덥히지 못하는 숙소에서 속헹은 그렇게 홀로 가족을 그리며 잔뜩 몸을 웅크리며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캄보디아인 속헹씨 다행히 산재 승인
2020년 12월 20일 냉골의 비닐하우스에서 속헹의 싸늘한 주검이 발견됐다. 이주노동자지원단체들은 그의 죽음을 알렸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국의 조사결과는 죽음의 원인을 식도정맥류 파열로 인한 과다출혈로 추정했다. 노동지청은 개인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이유로 면밀한 재해조사를 수행하지 않았다. 간경변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노동자가 며칠 전까지 고된 농사일을 하다가 한파가 몰아치는 밤에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홀로 피를 토하며 사망했다. 한국사회의 잔혹을 성찰하고 이 참담한 사건의 연원을 따져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밝히고 대책을 강구하기보다 ‘얼어죽은 것은 아니다’라는 추정으로 책임 없음을 강변하는 듯 보였다. 추위에 노출되면 말초혈관 수축, 간문맥압 상승, 신경호르몬 변화 등으로 간경변 환자한테 식도정맥류 출혈의 위험을 높일 수 있으며 과로도 마찬가지다. 농장주가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숙소에서 노동자가 적절한 난방조치 없이 생활하도록 방임했고, 건강검진 등을 통해 건강상태를 파악하지 않고 간경변 및 식도정맥류 환자에게 과도한 수준의 업무를 부여했다면 마땅히 업무와 사망과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이주노동자 기숙사 산재사망 대책위’를 중심으로 참담한 현실을 드러내고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 산재를 신청했고, 500일이 지난 올해 5월 2일에서야 산재 승인 결정을 받았다.
산재 승인은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염치를 보인 것이며 환영할 일이다. 산재 승인을 도왔던 변호사는 그러나 이것을 ‘우연한’ 산재 인정이라 했다. 요행스럽게 농장의 노동자가 5명이라 산재보험 적용대상이 됐고, 산재의 권리조차 모르고 있던 캄보디아의 유가족과 어렵사리 연결돼 위임을 받을 수 있었다. 가려질 뻔한 죽음이 사회적으로 알려져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인 필자에게 닿아 업무 관련성을 따질 수 있었다. 이런 여러 요행이 허락되지 않은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손상과 죽음은 여전히 개인의 비극으로 마감되고 만다. 속헹의 산재 승인만으로 참담한 죽음에 이 사회가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이중 삼중의 차별과 착취 상태에 놓여 있다. 2021년 12월 열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안전보건 및 노동권 실태와 과제’ 국회토론회 당시 주당 노동일, 노동시간, 월간 휴무일 등 노동조건 전반과 신체적·정신적 건강 수준 전반에서 제조업에 비해 농업 이주노동자의 상황이 훨씬 열악하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제조업에서는 직장건강보험이 적용되고, 근로기준법 적용 및 산재보험 대상이 될 가능성과 산업안전보건법 등의 법적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소규모 영농인들이 사업자등록증 없이도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어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비용부담이 높은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5인 미만의 소규모 자영농에 고용된 이주노동자들은 산재보험 적용대상이 아니다. 제도적 허점을 악용한 고용주들은 편법으로 산재보험 가입을 피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주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고립된 농촌지역에서 성폭력의 위험까지 더해진다.
■인권·노동권·건강권 없이 노동력 착취
몇년 전부터 이주노동자들과 인권단체들은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걸고 싸워 왔다. 그 결과 ‘비닐하우스 주거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근로기준법과 외국인고용법이 개정돼 2019년부터 시행됐다. 근로기준법에서 기숙사는 화장실과 세면·목욕 시설을 ‘적절’하게 갖출 것, 채광과 환기를 위한 ‘적절’한 설비 등을 갖출 것, ‘적절’한 냉난방 설비 또는 기구를 갖출 것, 화재 예방 및 화재 발생 시 안전조치를 위한 설비 또는 장치를 갖출 것 등을 규정했다. 안전하고 쾌적한 거주가 어려운 환경의 장소에 기숙사를 설치해서는 안 되게끔 했다. 외국인고용법에서 ‘사업주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한 기숙사를 제공하도록 하는 규정’과 ‘사업주가 이주노동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 기숙사 정보를 사전에 제공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노동부는 2019년 전국적으로 외국인 고용 사업장 숙소 유형 지도점검에 나섰지만 2020년 겨울 속헹은 비닐하우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법과 규정이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노동자들에게 살 만한 ‘집’을 제공하겠다는 정책적 의지가 전제돼야 한다. 속헹의 죽음 이후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 조립식 패널 등을 숙소로 제공하는 경우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지만 여전히 가건물은 완전히 규제되지 않고 있다. 숙소를 옮겨준 농장주가 시세의 4~5배에 이르는 월세를 임금에서 공제하는 일도 빈번하다.
행정당국은 법과 규정에서 이야기하는 ‘적절함’을 판단하고, 시정명령을 통해 개선을 관철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 ‘뜻’이 없기에 ‘법’만 남는다. ‘법’만 있고 ‘집’은 없는 상황이 지속된다. 법과 규정에 앞서 이주노동자를 편견으로 대하는 시각이 팽배한 농촌사회에서 품앗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돼온 착취가 얼마나 문제인지 자성할 수 있어야 한다. 드러낼 때 출발할 수 있다. 자신들만의 공동체 속에서 공유해온 비상식을 부끄러워하고 서로 경계해야 한다. 드러내고 연결해야만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옹호를 외면해온 근로감독과 안전보건 행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국제적 이동의 제한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의존해왔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깨달음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나 노동권, 건강권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부족한 노동력을 더욱 혹독한 착취로 메꾸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센터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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