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 55년.."제자들이 바로 스승입니다"

이진성 2022. 5. 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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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 선생. 1947년생입니다. 우리 나이 일흔여섯. 직업에 야학 교장이라 씁니다. 인향야학이라는 곳입니다. 정식 명칭은 인향초중고야간학교입니다. 학교는 인천에 있습니다. 올해로 개교 60년이 됐습니다.


김 선생은 인향야학 교장만 55년째입니다. 1967년, 만 스무 살 때부터였습니다. 그때는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노년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강단에 섭니다. 함께 가르치는 동료 교사는 19명입니다. 대학생 열일곱, 직장인 둘입니다. 야학은 매주 5일간 저녁 수업입니다.


학교 주소는 인천시 중구 송월동 3가 3-39입니다. 2001년부터 바뀌지 않았습니다. 11번 이사하고 정착한 곳입니다. 교실이 없을 땐 운동장이 교실이었습니다. 전기가 안 들어와 양초 켜고 수업한 적도 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면 휴교도 했습니다. 6차례 휴교에도 야학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문 닫을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1970년, 군 부대 지원으로 학교를 지었습니다. 인천 남구 학익동 산 중턱이었습니다. 겨우 지은 건물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강풍에 무너졌습니다. 끝이다 싶었는데 학생들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구두 닦아 돈을 벌고, 연하장도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천막을 쳤습니다. 남포등을 걸고 다시 야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학교 재건을 위해 동인천과 탑동 사거리에서 구두를 닦고 카드를 팔아서 생긴 돈입니다. 학교 재건에 보태주십시오, 하고 돈을 내미는데 구두 닦느라고 시꺼메진 손이 얼어서 갈라지고 피가 맺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평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아까도 이렇게 저렇게 해서 야학을 존재하려는 이유를 물었는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60년간 졸업생이 2,100명이 넘습니다. 300명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경찰, 교사, 교도관, 간호사, 목회자가 됐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학생들이 젊었습니다. 먹고 사느라 배울 때를 놓친 이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50대 이상입니다. 여성이 많습니다. 결혼하고 살림하느라 배움의 길이 끊긴 분들입니다. 다른 학생들 공부하는 걸 보고 용기 내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검정고시 합격자에게 합격증을 전달하는 모습(2022.05.11.)


최근 2년은 코로나19로 힘들었습니다. 학생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래도 30명 정도는 꾸준히 출석했습니다. 지난 4월 검정고시도 쳤습니다. 11명이 응시해 5명이 합격했습니다. 8월 시험엔 15명 합격이 목표입니다.

서른일곱에 만난 부인은 평생 든든한 후원자였다.


김 선생은 가정엔 죄인이었습니다. 홀어머니에 3대 독자 외아들입니다. 스무 살부터 야학이 전부였습니다. 어머니는 돈 못 버는 아들에게 별말씀이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했습니다. 하루 수입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일수 통장이 한아름 나왔습니다. 그걸로 아들을 뒷받침한 어머니였습니다.

결혼은 서른일곱에 했습니다. 원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정을 꾸릴 형편이 아니라 했더니 힘이 돼 주겠다 했습니다. 결혼 후 생계는 부인 몫이었습니다. 덕분에 야학에 전념했습니다. 부인은 5년 전 세상을 떴습니다. 김 선생은 지금도 죄스럽고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안향아학 교무실. 벽에는 교학불권(가르치고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말라)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인향야학을 거쳐 간 교사는 1,000명이 넘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바친 이들입니다. 김 선생은 이들이 최고의 후원자라고 했습니다. 봉사는 사람이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야학 교장 할 건지. 못 한다, 다시 할 거라는 대답은 가식일 거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할 거냐 물었습니다. 일은 시작한 사람이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언제냐 다시 물었습니다. 아직 여력이 있다 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 있을 때까지 하겠다 했습니다. 10년 뒤까지 한다면 스스로에게 용케 잘 견뎠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했습니다.


55년 전 첫 제자들은 70대가 됐습니다. 지금도 만나고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여전히 깎듯이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함께 고생한 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힘이 돼 야학은 60년을 맞았습니다.

교무실 벽에 걸려있는 리본들엔 스승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글씨가 적혀있다. 10년도 넘은 것들이다.


선생은 있지만 스승은 없다고 합니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김 선생은 말합니다. 나이를 초월해 스승과 제자가 이어지는 곳이 야학이라고. 학생은 지식을 얻고 선생은 지혜를 배운다고 했습니다. 학생이라면 이만큼 열심히 배울 수 있었을까 싶다고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스스로 부족함이 많다는 걸 아직도 느낀다고 합니다.

"주로 대학생인 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면서 말해요. 자기는 도움을 주겠다고 왔는데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공부를 배우는 할머니 어머니 같은 분들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표현을 그렇게 하는거예요. 야학을 떠날 때 자기가 시간 내서 봉사한 것 보다 배운 것이 더 많다며 떠납니다. 그것이 야학의 진면목이예요."

이진성 기자 (e-gij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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