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바벨탑'의 딜레마에 빠진 롯데
(시사저널=부산=오종탁 기자)
'지상 56층, 높이 300m 규모의 랜드마크로 2026년 말 준공 예정.'
떠들썩했던 공언과 달리 4월22일 오후 찾은 부산 중구 부산롯데타워 타워동 건설 현장은 썰렁했다.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황량한 대지 위에 골조 몇 개만 삐죽 솟아있고 공사 장비나 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인부 3명이 자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녹색 가림막이 펄럭이는 소리만 공사장에 울려 퍼졌다. 바로 옆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탓이었다.
5월31일 영업 종료 위기 속 전운 감도는 롯데타워
이런 건설 현장 분위기는 롯데타워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한다. 대대적으로 건설 계획 수정안을 공표한 지 3년째, 사업이 궤도에 오른 지는 27년째다. 답보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자 롯데그룹과 부산시를 향한 부산 시민의 감정은 불만을 넘어 분노로 치닫는 중이다. 공사장 근처에서 만난 부산 시민 문형기씨(가명·53)는 "순리에 맞게 지었으면 벌써 완공되고도 남았을 텐데 롯데가 질질 끌고 부산시는 끌려다녀 이 지경까지 왔다"며 "금싸라기 중 금싸라기 땅을 30년 가까이 버려두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사저널이 롯데그룹과 부산 지역 정·관계 등을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롯데는 부산롯데타워 타워동 공사 현장 바로 앞 백화점동, 아쿠아몰동, 엔터테인먼트동의 임시사용승인 시한인 5월31일을 앞두고 막다른 길에 내몰렸다. 롯데와 마찬가지로 여론의 압박 때문에 기로에 선 부산시가 '벼랑 끝 전술'을 꺼내 들면서다. 부산시는 4월29일 공무원, 전문가 등이 참석한 롯데타워 경관심의위원회를 열어 심의 유보 결정을 내린 뒤 롯데에 초강경 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경관심의는 타워동 건축의 첫 번째 관문이다. 경관심의를 통과해야 다음 단계인 건축심의, 교통영향평가 등의 절차를 밟을 수 있다.
롯데가 제출한 롯데타워 타워동 관련 자료, 특히 높이와 디자인이 안전성과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부산시는 판단했다. 더 나아가 부산시 측은 "롯데의 전반적인 준비 상태가 부실하다. 10여 년간 보여온 시간끌기 식 태도에서 변한 게 없다"고 비판하면서 경관심의위를 추가로 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롯데타워 타워동이 5월 내로 경관심의위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백화점동, 아쿠아몰동, 엔터테인먼트동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지난 1월부터 부산시는 롯데가 타워동 건설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며 3개 시설에 대한 임시사용승인 시한 연장을 불허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날 아쿠아몰동은 평소와 다름없이 영업 중이었다. 한 매장 점원은 "폐점될 수도 있다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불안하다"고 말했다.
천문학적인 매출 피해가 발생하고 800여 개 업체에 근무하는 직원 2800여 명이 실직할 위기에 처했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롯데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모습이다. 롯데그룹 측은 "부산시로부터 (경관심의 유보에 따른) 추가 자료 제출 요구를 받는 대로 검토해 이른 시일 내에 수정안을 내겠다"고 담담하게 밝힌 뒤 '정중동'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물밑으론 그룹 최고위 관계자와 박형준 부산시장의 면담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6월1일 지방선거를 앞둔 박 시장에게 이번 롯데타워 사태를 해결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박 시장은 5월12일 후보 등록 이후부턴 아예 직무정지에 들어간 상태다. 양미숙 부산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사태가 이토록 악화한 데 박 시장의 '나 몰라라 식' 태도의 영향이 적지 않다. 그간 롯데에 끌려다닌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생각이 없다시피 했다"면서 "롯데타워 같은 초대형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부산시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롯데에 딱 떨어지는 요구를 한 적도 전무한 마당에 박 시장이 해결 방안을 짜내리라 기대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책임…해결 기대 못 해"
양 사무처장은 "전임 오거돈 시장도 2019년 롯데와 함께 롯데타워 건설 계획 수정안만 내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6·1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인 박 시장과 맞붙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변성완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이다. 2019년 1월 부산시 행정부시장으로 취임한 그는 2021년 4월 시장 권한대행 퇴임 때까지 롯데타워에 관한 행정을 진두지휘했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박형준·변성완 두 후보는 롯데타워 이슈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각자의 다른 공약을 어필하는 데 매진하는 중이다.
최근 상황만 톺아보면, 2021년 4월 박 시장이 취임하자마자 부산시가 롯데타워 타워동의 도시계획시설사업 실시계획 인가 시한, 즉 착공 시한을 그해 5월에서 2022년 5월로 1년 연장했다. 통산 5번째 연장이었다. 당시 백화점동과 아쿠아몰동, 마트의 임시사용승인 시한도 연장했다. 지역 여론이 악화한 가운데 부산시는 2021년 10월 롯데에 타워동 건설에 관한 실행계획서 제출을 요구했다. 한 달 뒤 롯데는 공사 기간, 규모 등 세부적인 건설 계획이 없는 1장짜리 서류를 내며 "롯데타워 타워동 디자인을 전체적으로 계획해 2022년 상반기에 건축심의 접수를 목표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냈다. 부실 계획서 논란이 불거졌고, 부산시는 당혹감을 표시하며 롯데에 세부적인 계획을 다시 내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 언론 등은 한목소리로 롯데를 비판했다. 롯데는 롯데타워 타워동 디자인 설계의 진행 현황을 밝히면서 2022년 1월 중 대(對)시민 공개를 약속했다. 비슷한 시기 부산시는 롯데타워 타워동 건설에 분명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타워동 내 차별화된 콘텐츠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임시사용승인 시한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롯데를 바짝 몰아붙였다. 롯데의 준비 기간이 길어져 디자인은 3월에야 공개됐다.
구마켄코 일본 도쿄대 교수가 맡은 새로운 롯데타워 타워동 외형 디자인은 선수파(船首波·배가 달릴 때 뱃머리에 이는 파도)를 형상화했다. 지상 56층, 높이 300m 규모에 일부 층은 기둥으로 채우고 고층부 10개 층과 중층부 2개 층, 저층부 13개 층 등 25개 층만 사용하는 형태다. 위쪽 10개 층에는 전망대, 아트 갤러리 등을 만들고 중간 2개 층에 스카이라운지, 익스트림 스포츠 시설, 스카이 워크를 조성한다. 아래쪽 13개 층에는 쇼핑몰과 체험시설, 푸드홀 등을 둘 예정이다.
롯데는 롯데타워 타워동 조감도와 함께 공사 재개 계획안도 제시했다. 실제로 2019년 4월 중단했던 타워동 건설 공사를 3년 만에 재개하기 위해 작업 현장에 방치된 컨테이너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가 3월28일 부산시를 찾아 롯데타워 타워동 건설을 문제 없이 추진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희망의 불씨는 4월29일 경관심의 유보 결정으로 또다시 사그라들었다. 롯데와 부산시가 사실상 출구 없이 대치하는 국면에서 향후 임시사용승인 시한 연장 불허와 이에 따른 소송전, 롯데타워 타워동 사업 계획 전면 취소 등 최악의 결과들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부산시는 롯데에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지적으로 몽니를 부리고, 롯데는 최소한의 의지만 나타내며 정당성과 명분을 쌓아나가는 지난한 형국"이라며 "특히 업황이 좋지 않은 데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건설로 초고층 건물을 짓고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낀 롯데 입장에선 롯데타워 타워동을 지을 유인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눈치 싸움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맨해튼 외에 초고층 성공 지역 없다"는 분석도
코로나19 여파, 이커머스 등 신사업 부진 속에 롯데쇼핑의 지난해 연결 영업이익은 2156억원으로 전년 대비 37.7% 감소했다. 당기순손실은 2868억원으로 적자 폭이 커졌다.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는 2월 각각 롯데쇼핑의 무보증사채 신용등급을 기존 'AA'에서 'AA-'로 하향 조정했다. 당장 수익성이 떨어지는 초고층 건물 건설 사업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국내 최고층(123층·555m) 빌딩인 롯데월드타워의 경우 건축비가 당초 예상했던 2조원대에서 천정부지로 치솟아 최종적으론 3조8000억원에 이르렀다. 더구나 2017년 4월 문을 연 뒤엔 주변 오피스 빌딩보다 높은 공실률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기대했던 글로벌 대기업들의 입주는 쉬이 이뤄지지 않았고, 롯데 계열사를 대거 입주시키며 겨우 체면치레를 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신격호 창업자가 롯데를 경영할 때나 '초고층 건물 지어라' 하면 '알겠습니다' 하는 분위기였지 이젠 그런 방식이 통용되지 않는다"면서 "기업 경영 관점에서는 물론 글로벌 트렌드로도 초고층 건물의 시대는 끝났다"고 분석했다. 그는 "자본과 사람이 밀려드는 미국 뉴욕 맨해튼 외에 초고층 건물을 지어 성공한 지역을 찾아보기 어렵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랜드마크 필요성'을 외치며 초고층 건물 건설 붐을 일으키는 현실"이라며 "부산에 돌이키지 못할 초고층 건물 건설 약속을 해놓고는 높은 실패 확률을 피하거나 줄이려 아등바등하는, 소위 '바벨탑'의 딜레마에 롯데가 빠져있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 '주거시설 포함' 여부가 여전히 쟁점?
롯데는 1995년 옛 부산시청사 부지와 수면매립지에 지상 107층짜리(500여m 높이) 타워동과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 등의 부산롯데타워 건설 계획을 세웠다. 부동산 투자의 귀재인 신격호 롯데 창업자는 서면 지역에 이어 또다시 부산의 상업 중심지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롯데타워 건설을 약속했다. 부산시와 시민 입장에서 롯데타워는 많은 이익을 롯데에 내어주는 데 대한 반대급부 성격이었던 셈이다.
2001년 공사가 시작된 후 백화점동과 아쿠아몰동, 마트 등이 순차적으로 세워졌다. 반면 핵심인 타워동은 2013년 터파기 공사가 마무리되곤 2018년까지 진척이 없었다. 그 배경에는 타워동 내 주거시설 포함 여부를 둘러싼 진통이 있었다. 롯데는 2009년부터 타워동에 주거시설을 넣으려 시도했다. 타워동의 사업성이 부족하다는 명분을 들었다. 시민사회단체 등의 반대에 밀려 해당 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롯데는 부산시로부터 이미 지은 다른 상업시설에 대해서만 임시사용승인을 얻어내는 방식으로 영업해 왔다.
롯데는 2019년 부산시와의 합의를 통해 타워동의 높이를 기존 500m 내외에서 380m로 낮추되 주거시설은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완공일도 '2022년 12월'로 못 박았으나, 5월 현재까지 착공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2021년 11월 부산시 관계자가 롯데와의 물밑 협상에 관해 "롯데에 원안대로 107층 규모의 랜드마크급 타워동을 추진하도록 주문했다. (그러기 위해선) 주거시설 도입 등 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해, 타워동 내 주거시설 포함 이슈가 여전히 착공을 가로막고 있을지 모른다는 분석이 나왔다. 롯데가 불가능한(사업성이 없는) 층수와 높이를 요구하는 부산시에 대해 똑같이 불가능한 주거시설 포함 카드로 응수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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