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우리나라도 위스키 만든다"
달콤한 과실향 이은 훈연향이 훅
출시 열흘에 매진 '김창수 위스키'
리셀가 80만원, 입고 요청 봇물
"3년 뒤 해외시장 진출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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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간을 기다려 보았습니다.” “새벽부터 ‘오픈런’을 뛰어서 한병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가치 1000억원대 갑니다.”
한국산 싱글몰트 위스키, ‘김창수 위스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28일 시장에 풀려 딱 336병만 출시된 이 위스키는 대형마트와 주류상에 입고된 지 약 열흘 만에 초도물량이 전량 매진됐다. 위스키 마니아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에 돌입했고 ‘긴급 리뷰’라며 시음기를 재빠르게 올렸다.
대형마트에서 22만원대에 거래된 이 위스키의 리셀가는 벌써 80만원대. ‘김창수 위스키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는 리스트도 나돈다. 위스키 바에서 20㎖ 한잔은 3만원대에 팔린다. 위스키 맛에 견줘 촌스럽다, 예쁘다는 평이 엇갈리는 병 라벨엔 김창수 대표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자부심 충만한 문구가 선명하다. “우리나라도 위스키 만든다.” 김창수 대표가 직접 쓴 손글씨다.
한국에서 국산 원액을 포함한 위스키는 1987년 처음 나왔지만 경쟁력이 없어 곧 생산이 중단됐다. 그 뒤 2020년, 위스키 증류소 두곳이 문을 연다.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와 쓰리 소사이어티스 증류소다. 2021년 9월, 쓰리 소사이어티스 증류소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디스틸러(증류책임자)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든 첫 국산 싱글몰트 위스키를 출시했다. ‘김창수 위스키’는 한국인 디스틸러가 만든 첫 싱글몰트 위스키로서 평가를 받는다.
위스키 병뚜껑이 열리자…
9일 오후 김포와 강화 사이에 위치한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를 찾았다. 304㎡(92평) 남짓한 공간에 오크통 200여개가 3~4개 층을 이뤄 얌전히 놓여 있었다. 증류소 전체에는 꽃향기 같기도 하고 축축한 낙엽 냄새 같기도 한 술향이 가득 풍겼다. 김창수(36) 대표는 최근 열광적인 시장 반응을 알고 있다면서도 “10년 동안 달려와서 만든 술인데, 소감은 솔직히 너무 별것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감개무량하지도 않고 그동안 너무 바빴어요. 출시부터 지금까지 병입, 허가, 등록, 유통, 물류, 홍보 등 할 일이 많았죠. 완전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위스키가 새지나 않을까, 병이 터지지나 않을까, 맛은 있을까 늘 걱정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술을 (입고해) 달라고 연락이 오는데,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네요.”
2020년 6월 이곳에 김 대표가 직접 디자인하고 고심 끝에 프로그램을 개발해 제작한 증류기가 들어왔다. 발효조(발효탱크), 당화조(당 추출 탱크) 등 설비 설치까지 모두 김 대표와 그의 친구인 직원이 함께했다. 위스키 만드는 과정을 단순화하면, 우선 몰트를 가루로 만든 뒤 당화조로 옮겨 뜨거운 물을 섞어 적정 온도를 맞추고 당을 추출한다. 며칠 뒤 발효가 끝나면 이 액체를 증류기에 넣고 두번을 증류한다. 이렇게 나온 투명한 증류액을 ‘스피릿’이라고 하는데, 위스키의 원주가 된다. 이를 참나무통(오크통)인 ‘캐스크’에 넣고 숙성한다.
증류소 선반엔 컵라면이 즐비했다. “매일 거의 라면 먹어가면서” 온 힘을 다해 위스키를 만들었지만 처음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기대감이 높지 않았다. 1년 남짓한 숙성 기간이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이었다. 뚜껑이 열리자 판도는 달라졌다. 십수년 된 위스키 못지않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출시 전엔 평가가 안 좋았죠. 경력도 별로 없고 저렇게 허름한 증류소에서 만든 저숙성 위스키가 절대 맛있을 수 없다고 깔보는 시선도 많았던 거죠. 지금은 과도한 관심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느껴보는 반응이 확 들어왔어요.”
김창수 위스키의 첫 버전은 정확히 1년1개월20일 동안 숙성된 것이다. 이 술은 스페인산 오크통(셰리 캐스크) 하나에 고스란히 담겼다가 나온 ‘싱글 캐스크’이면서 여기에 물을 섞지 않고 병입한 ‘캐스크 스트렝스’다. 도수는 54.1도로 높은 편이지만 강한 술 같지 않게 부드럽다. 첫입에는 단 과일향이 나면서 상큼한 느낌이 지나가고 뒤쪽에 훈연향이 훅 치고 들어오는, 다채로운 맛과 향이 난다.
“숙성이 길다고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스피릿’을 맛있게 만들어 다른 조건을 최상으로 맞춘다면 비록 짧은 숙성일지라도 맛있는 위스키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위스키 업계의 아이돌
위스키 업계에서 그는 오래전부터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대학 시절 위스키에 매혹돼 28살인 2014년 자전거와 텐트를 짊어지고 무턱대고 스코틀랜드 방방곡곡을 누비며 102곳에 이르는 그곳의 모든 위스키 증류소를 방문했다. 2015년 일본 사이타마현에 있는 지치부 증류소에서 연수한 뒤 한국에 돌아와선 위스키 바, 주류 수입사 등에서 일하면서 꼬박꼬박 창업자금을 모았다. 2020년부터 위스키 관련 유튜브를 제작하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의 팬으로 ‘입덕’한 이들은 ‘위스키 성덕(성공한 덕후), 김창수를 지지하는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야외 취침을 불사하는 ‘오픈런’ 행렬에는 ‘알바’들도 많았지만 김창수라는 불굴의 한국인 위스키 디스틸러이자 마스터블렌더(최종 생산 책임자)를 응원하는 마음가짐으로 줄을 선 이들도 분명 있었다.
“솔직히 어렵습니다. 순수익으로 치자면 2년 동안 336병을 만들어 팔아 몇백만원 번 게 저희의 첫 수입이에요. 양질의 술을 만들었을 때 세금을 높게 매기는 현행 종가세 체계가 유지되는 한 한국에서 고급 술 산업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최근 대기업이 위스키 시장에 진출하는 등 여전히 우려는 많다. 희망이 있다면, 기업 가치나 잠재력을 높이 산 투자자와 지자체들의 협력 제안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 그간 노력이 헛되지 않아 늦여름이나 가을께 ‘김창수 위스키’의 두번째 버전도 나올 예정이다. 독특하고 묘한 피트 향이 강한 이번 술과 색깔이 완전히 다른 술(논피트)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저희 위스키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지금 술은 정식 제품이라기보다는 제 증류소가 나갈 방향이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다양하고 실험적인 제품들을 앞으로도 보여드리고 3년 이상 숙성한 뒤부터 정식 제품으로, 대중적으로 출시할 예정입니다. 그때부터는 해외 시장도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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