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지키려면 반지성주의와 싸워야".. 문혁 겪은 중 지식인의 깨달음

2022. 5.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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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1회>

<문혁 시기 마오쩌둥 개인숭배. 사진/공공부문>

2022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물코처럼 자유가 공정, 민주, 번영, 연대, 박애 등의 가치를 한 줄로 꿰고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과학과 진실을 거부하는 불합리와 소수 의견을 억누르는 다수 폭력이다.

국가원수가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와의 투쟁을 선포한 사례는 드물 듯하다. 다만 각국의 지도자들은 정보 왜곡과 다수 폭력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론해 왔다. 일례로 2021년 1월 20일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모든 의견 차이가 반드시 전면전(total war)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취임 2주 전인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무장 점거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진실게임과 세몰이에 휘둘리는 미국 정치의 분열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2년 5월 10일, 20대 대통령 취임식. 사진/조선일보 DB>

정보화 혁명 이후 개개인은 인터넷의 알고리즘을 타고 제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다수가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 갇힌 포로의 삶을 살아간다. 보고 싶은 기사만 찾아서 보고, 듣고 싶은 뉴스만 골라서 듣고, 믿고 싶은 이야기만 가려서 믿는다. 지식과 정보는 광속으로 이동하는데, 나치식 선전과 공산당식 선동이 오히려 더 잘 먹힌다. 이성의 추락, 문명의 역리(逆理)가 아닐 수 없다. 갈수록 진영싸움과 부족 전쟁이 심해진다. 문혁의 광풍이 정치의 쓰나미가 되어 불시에 세계 각국을 강타할 기세다. 이 난제를 과연 어떻게 풀 수 있나?

취임사의 메시지대로 “자유 시민”이 “진실과 과학을” 등불 삼아 “반지성주의”와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상식을 포기하고 이성을 부정하면 인류의 문명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문혁 “10년의 대동란”을 직접 겪은 중국 지식인들의 깨달음도 다르지 않았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반지성주의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

‘마오가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미신...문혁 시기 반지성주의에 대한 중 지식인의 비판

대표적 인물로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인민일보>> 부편집장을 역임했던 철학자 왕뤄쉐이(王若水, 1926-2002)를 꼽을 수 있다. 1926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뤄세이는 1948년 베이징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직후부터 인민일보사에서 근무했다. 1950년대 그는 민감한 국면마다 예리한 논평을 써서 마오쩌둥의 환심을 샀다. 특히 1957년 4월 “백화제방” 운동을 개시할 때 그가 썼던 논설에 대해 마오쩌둥은 격찬했다. 문혁 이전 40대의 왕뤄세이는 이미 인민일보사에서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1972년부터 그는 사인방을 비판하면서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났고, 결국 인민일보사에서 쫓겨나 4년간 베이징 외곽 다싱(大興)구의 한 인민공사에서 “노동개조”의 형벌을 받았다. 1976년 인민일보사에 복귀한 왕뤄세이는 본격적으로 문혁 시절의 광기와 폭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13일 후야오방이 주재하는 “이론 무허회(務虛會, 대토론회)”에서 마오쩌둥 개인숭배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가 발표한 글의 제목은 “문화대혁명의 교훈은 반드시 개인 미신(迷信)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인 미신”은 현대중국어에서 인격숭배나 개인숭배와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개인숭배와 “개인 미신”의 어감은 확연히 다르다. 미신이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맹목적 믿음을 이른다. 모든 개인숭배가 불합리하지만, “개인 미신”은 그중 최악을 이른다.

마오쩌둥이 불세출의 구세(救世) 영웅이라는 미신, 마르크스주의가 절대 진리라는 미신, 레닌의 민주집중제가 최선이라는 미신, 마오쩌둥 사상이 인류를 구원하는 혁명 이론이라는 미신, 마오쩌둥에 반대하면 반혁명 분자라는 미신, 반혁명 분자는 모두 색출해 제거해야만 한다는 미신,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미신, 사회주의가 가장 우월한 체제라는 미신,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개인은 기꺼이 한 몸을 바쳐야 한다는 미신,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미신, 자산가는 노동자를 착취만 한다는 미신 등등 문혁 당시 중국 인민의 의식을 지배하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비과학적, 비상식적 믿음일 뿐이다.

<1998년 5월 4일 모교 베이징 대학 100주년을 맞아 잠시 귀국했던 왕뤄쉐이의 모습. 사진/wikipedia.com>

문혁 시기 중국 인민은 날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비판대회, 투쟁대회, 강용(講用)대회, 성토대회에 불려 나가 “마오쩌둥 만세!”를 외치며 “인민의 적”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집체적 세뇌의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인민은 마오쩌둥을 신처럼 섬기고 떠받드는 “개인 미신”의 신도들로 전락했다.

1972-1976년 사이 강제노역에 내몰린 왕뤄세이는 맨 밑바닥 생산의 현장에서 마오쩌둥에게 영혼을 팔려버린 인민대중의 정신적 빈곤을 관찰했다. 그는 인민대중을 “개인 미신”의 늪에 빠뜨린 마오쩌둥의 저의를 추적했다.

왕뤄쉐이의 연구에 따르면, 1956년 덩샤오핑은 “영수에 대한 애호는 당과 계급과 인민에 대한 애호의 표현일 뿐, 일개인의 신격화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후, “우리의 임무는 계속 견결히 중앙이 개인의 돌출을 반대하고, 개인에 대한 찬양과 송덕을 반대한다는 방침을 견지하는 것”이라 밝혔다. 적어도 1956년 중공중앙은 개인숭배를 거부하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혁 시기 비투(批鬪) 대회. 사진/李振盛, “紅色新聞兵”에서>

1958년이 되면 마오쩌둥은 개인숭배를 논하면서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인민의 숭배가 반드시 틀릴 수는 없다며 스스로 신이 되는 길을 슬그머니 열었다. 1963년 마오쩌둥은 “개인 미신”에 대한 반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는 영수, 정당, 계급, 인민의 유기적 상호관계에 대한 레닌의 완정(完整)한 학설을 부정하고, 당의 민주집중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 당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망쳐놓은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농업우선정책”을 내걸고 과감한 실용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행정의 실권을 상실한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긍정했다.

<“계속 혁명의 노상에서 더 큰 승리를 탈취하자!” 문혁 시기 마오쩌둥 개인숭배 포스터. 그림/공공부문>

왕뤄쉐이는 말한다. “개인 미신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는 중공중앙의 공식 석상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문혁에 대한 마오쩌둥의 총책임을 직접 물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1981년 6월 27일 “역사결의”에서 중공중앙은 공식적으로 “문혁의 최종적 책임은 마오쩌둥에 있다”고 선언했는데, 그 문건에서 사용된 단어나 어기(語氣)를 보면 왕뤄세이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왕뤄세이가 직접 쓴 다음 문단을 보자.

“문화대혁명은 우리 당과 우리 민족의 한편의 커다란 재난이었다. 이는 주로 린뱌오와 사인방의 파괴적 행동이 빚은 것이지만, 어떻게 이 몇 사람이 8억 인구의 커다란 나라, 3천만 당원의 거대한 당을 하늘과 땅이 뒤집히도록 흔들 수 있겠는가?

영묘한 마오 주석이 어찌하여 즉시 그들의 음모를 발각하고 격파하지 못했는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마오 주석의 깃발을 들게 하고, 마오 주석의 권위와 명망을 빌어서 그토록 많은 나쁜 짓을 하도록 했는가? 이는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 ‘문혁은 마오 주석이 친히 일으키고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문혁은 당이 일으키고 이끌었다고 하지 않는다. 진정 그러하다면, 문혁은 마오 주석 일개인이 일으키고 이끌었음이 분명하다!”

전반적인 글의 논의는 물론, “마오주석이 친히 일으키고 이끌었다”는 문장은 토씨까지 그대로 1981년 6월 27일 “역사결의”에 그대로 포함되었다. 왕뤄세이의 마오쩌둥 비판이 그대로 중공중앙의 공식 입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왕뤄쉐이, 옌자치, 리홍린...자유를 등불 삼아 반지성주의와 싸웠던 대륙의 자유인들

지난주 “슬픈 중국” 30회에 소개된 옌자치(嚴家其, 1942- )의 회고에 따르면, “1979년 2월 문혁에 대한 왕뤄세이의 체계적 분석은 많은 사람들의 격찬을 받았다.” 특히 “문혁은 잘못된 방법으로 그릇된 대상을 겨누고 진행된 잘못된 혁명”이라는 왕뤄세이의 발언이 널리 인용되었다. 옌자치는 왕뤄세이의 문혁 비판에 큰 자극을 받아서 문혁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개시했고, 그로부터 7년 후 기념비적 대작 <<문화대혁명 10년사>>를 출판했다. 젊은 시절 옌자치의 지적 모험과 이후 해외에서 그가 주도한 중국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살펴보기로 한다.

1980년대 개혁파의 이론가 리훙린(李洪林, 1925- )은 2015년 막역한 친구 왕뤄세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왕뤄세이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라는 점을 믿고 혁명에 투신했다.” 그는 “단순히 당대(當代) 중국의 철학자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용감한 전사였다.”

<중국의 자유사상가 리훙린(李洪林, 1925- )의 모습. 사진/중국인터넷>

1959년부터 중공중앙의 이론가로 활약했던 리훙린은 문혁 시기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오지에 하방(下放)되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77년 중앙선전부 이론국의 부국장으로 복귀한 후, 그는 1978년 출판한 <<과학과 미신>>에서 수령에 대한 “현대의 미신”을 비판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그의 투쟁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결국 톈안먼 대학살 직후 그는 구속당했다. 1990년 출옥한 후 리훙린은 중공중앙 주도의 소위 “투쟁운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중국사상운동사 1949-1989>>를 집필했다. 개인적 체험을 충분히 반영한 이 기념비적 저서는 중국의 정치운동사, 특히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필독서다. 이 책의 서문에는 다음 문단이 보인다.

“1949년 이래 중화 대륙의 사회생활은 온통 ‘사상투쟁운동’이었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당의 지도력, 곧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옹호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군중을 격동시켜 비판 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그 점에서 사상 영역의 군중 운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군중성(群衆性) 투쟁’이란 결국 무력에 의한 강압이기 때문에 투쟁을 당한 사람은 당연히 심복(心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압력은 갈수록 심해지고, 규모는 갈수록 확대되고, 횟수는 갈수록 빈번해졌다.”

왕뤄쉐이, 옌자치, 리홍린은 모두 문혁의 광기를 직접 겪은 고난의 체험자였다. 진실을 왜곡하고 과학을 부정하는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목도(目睹)했기에 그들은 모두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갈망했다. 그들은 모두 자유를 되찾기 위해 중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당독재의 반지성주의와 투쟁했던 대륙의 자유인들이었다. 깊은 반성과 심오한 사색이 담긴 이들의 저서들을 읽다가 보면 절로 깨닫게 된다.

자유를 빼앗긴 개인은 권력자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병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유를 잃은 개인은 권력자의 노예로 전락한다. 여기서 노예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잃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진 수동적, 피동적, 종속적 존재를 이른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후 미국으로 망명한 왕뤄세이는 2002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문혁의 실상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다가 병사했다. 역시 1989년 톈안먼 이후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한 옌자치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중국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지금도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다. <계속>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시위 현장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옌자치의 모습. 사진/중국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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