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적 왜곡에 40년 고통마저 부정당해".. '광수' 낙인에 무너진 시민군 삶

나주예 2022. 5. 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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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입 낭설' 피해 입은 시민군 3인>
처벌법 제정해도 5·18 허위사실 유포 계속
"지속적 진상규명으로 역사 왜곡 근절해야"
보수논객 지만원(81)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5·18 북한 특수군 침투 증거로 제시한 사진. '시스템클럽' 홈페이지 캡처
"고생한 사람들한테 고생했다고 말은 못하고 북한군이라니. 고통 속에 살아온 지난 40년 세월을 전부 부정당한 것만 같았습니다."
5·18 국가유공자 양홍범(62)씨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양홍범(62)씨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다. 6년여 전 어느 날, 5·18 재단에서 걸려온 전화는 기가 막힌 소식을 전했다. 보수 논객 지만원(80)씨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양씨를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북한특수군, 이른바 '광수' 김대식이라고 지목했다는 것이다. 전남 무안군에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양씨에겐 졸지에 '제310광수'라는 딱지가 붙었다.

처음엔 우스갯소리로 넘기려 했지만 거짓말로 점철된 선동은 어느새 온라인상에서 '사실'로 굳어가고 있었다. 양씨가 5·18기념재단,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동료들과 함께 지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 이유다. "지만원씨 말대로 내가 계급 높은 북한 간첩이라면 굳이 여기에서 살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광주항쟁 당시 다친 허리 때문에 평생 제대로 된 일도 못하고 살아왔는데 또다시 생채기가 생겼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참여 이후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역사 왜곡은 또 다른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 전남 강진에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5·18에 참여했던 김규식(69)씨는 "평범한 시민들의 선의를 왜곡하는 이들을 볼 때면 참아왔던 트라우마의 임계점이 폭발할 때가 있다"며 "항쟁에 참여했단 이유만으로 빨갱이 취급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니 젊은 시절 용기를 낸 업보를 치르는 게 아닐까 싶다"고 토로했다.

'광수 36번'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지목된 양동남(62)씨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을 오히려 잘 믿지 않냐"며 "1990년 정부도 부정했던 북한군 개입 주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젠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허탈감이 든다"고 말했다.


지만원, 징역형 선고받고도 허위사실 주장 지속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고 주장한 지만원씨가 2019년 5월 16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지만원씨가 '광수'로 지목한 5·18 민주화운동 참여자는 600명이 넘는다. 당사자들과 5·18 단체는 지씨의 허위 주장으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2016년 3월과 2017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5~2019년 네 차례에 걸쳐 형사 고소도 이뤄지면서, 지씨는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 항소심에서 정보통신망법 위반(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법정구속을 면한 지씨는 3월 자신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광수를 부정하는 사람은 무식하면서 잘난 체하는 사람"이라는 글을 올리며 허위사실 유포를 멈추지 않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악의적 폄훼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지난해 1월 5일부터 ‘5·18 역사왜곡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허위 주장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광주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지난해 12월 5·18을 왜곡하는 내용의 인터넷 게시물과 유튜브 영상 등을 올린 네티즌 11명에게 해당 법을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문제의 게시글과 영상물엔 5·18을 ‘폭동’ 또는 ‘반란’으로 규정하거나 ‘북한군 개입설’ 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5·18기념재단은 5·18 역사왜곡처벌법의 입법 미비점 보완을 요구할 계획이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연구소 팀장은 "5·18 관련 댓글은 폭동, 북한군 개입, 호남 비하라는 세 키워드를 핵심으로 한다"며 "노골적인 폄훼는 줄긴 했지만 왜곡된 내용의 댓글은 여전히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차 팀장은 "현행법은 연구목적 허위사실 유포, 예컨대 강의 도중 5·18을 왜곡하는 발언을 하면 처벌받지 않는 등 맹점이 있다"며 "법 개정 필요성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5·18 유공자들은 지속적인 진상규명을 통해 역사 왜곡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홍범씨는 "법도 데모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어도 국군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눠선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며 "5·18은 시민들이 순수와 정의를 위해 했던 일이란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양동남씨는 "5·18은 아직 진행되고 있다"며 "전두환 대통령은 죽었고 명백하게 밝혀진 게 없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운동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주예 기자 juye@hankookilbo.com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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