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팽개친 '힘의 정치' [오늘과 내일/정연욱]

정연욱 논설위원 2022. 5.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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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첫 문을 열 때마다 여야가 하는 국회직 배분 협상의 열쇠는 국회의장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다.

법사위원장이 여러 상임위원장 중 하나임에도 실질적 권한 때문에 국회직 '넘버2'로 불린 이유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여야가 나눠 갖는다는 관례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 정착됐다.

그래서 놓지 않으려던 법사위원장을 올 6월부터 국민의힘에 넘기겠다는 합의문에 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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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盧정권 때 만든 院구성 원칙 무시
의석수에만 기댄 힘의 정치는 명분 없어
정연욱 논설위원
국회가 첫 문을 열 때마다 여야가 하는 국회직 배분 협상의 열쇠는 국회의장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다. 법안 처리의 길목을 지키는 법사위원장의 비중도 국회의장 못지않아서다. 법사위원장이 여러 상임위원장 중 하나임에도 실질적 권한 때문에 국회직 ‘넘버2’로 불린 이유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여야가 나눠 갖는다는 관례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 정착됐다.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면서다. 여당이 다수당으로 국회의장을 차지하면 제1야당이 법사위원장을 맡는 식이다. 견제와 균형 원칙이다. 여야가 사사건건 충돌하긴 해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153석)을 차지했어도 법사위원장은 야당 몫이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개헌저지선 100석에도 못 미친 81석에 불과했지만. 4년 뒤 총선에서 한나라당 간판만 바꾼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152석)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불문율은 문재인 정권에서 깨졌다. 2020년 총선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으로 압승하자 국회의장은 물론 법사위원장도 양보할 수 없다고 나섰다. 야당이 법사위원장을 맡는 것은 오래되지 않은 관행일 뿐이라고 했다. ‘견제와 균형’ 명분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노무현 정권에서 만들어진 원칙에도 개의치 않았다.

이후 벌어진 입법 폭주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선거의 룰을 정하는 선거법도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밀어붙였다. 대통령 권력에, 압도적 의석까지 차지한 여당이 힘자랑을 하다 보니 거칠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민심의 평가는 냉정했다. 민주당이 작년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큰 표차로 패한 것은 부동산 정책 실패와 함께 힘의 정치에 대한 심판이었다. 결국 보궐선거 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놓지 않으려던 법사위원장을 올 6월부터 국민의힘에 넘기겠다는 합의문에 서명한 것이다.

3·9대선 결과는 5년 만의 정권교체였다. 윤석열, 이재명 후보의 표차는 0.73%포인트였다. 민주당은 민주화 이후 역대 최소 표차에만 주목했다. “왜 졌을까” “무엇을 고쳐야 하나”라는 근원적 반성엔 선을 그었다.

송영길은 이재명(47.8%)과 심상정(2.24%)을 찍었던 국민들을 합치면 윤석열을 안 찍은 국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런 논리라면 민주당이 ‘촛불대선’이라고 강조한 2017년 대선 결과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재인 득표율(41.08%)은 반문재인을 내건 홍준표-안철수-유승민 득표율을 단순 합산한 결과(52.2%)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 아닌가.

뼈아픈 원인 진단이 없으니 다시 ‘힘의 정치’에 기대는 모양이다.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넘긴다는 1년 전 약속도 휴지 조각으로 만들 태세다. 민주당은 법사위원장은 다수당이 가져야 한다고 했다. 추후 협상을 위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명분도 없이 오로지 강경 지지층만 바라보겠다는 것 아닌가. 국민의힘이 검수완박 입법 합의를 파기했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70년간 내려온 형사사법 체계를 흔드는 입법을 그 흔한 공청회 한번 없이 군사 작전하듯이 밀어붙이는 것인가.

정권을 뺏긴 아쉬움은 클 것이다. 그러나 이럴수록 국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명분에 맞는 길을 가야 한다. 실리 없는 명분은 허망하지만, 명분을 팽개친 실리는 거센 역풍을 부를 수밖에 없다. ‘0.73%포인트’의 의미를 잘 읽으면 약이지만, 잘못 읽으면 독이 된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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