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만큼 똑똑해".. 반지성주의, 전문가 혐오서 시작한다

양지호 기자 입력 2022. 5.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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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관련 대표작들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다고 했다. 반지성주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는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 낙선 이후 지지자들이 미 연방의회 의사당으로 몰려가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겼다”고 난동을 피운 사건일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단지 상대편을 ‘지성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표현이 아니다. 매카시즘 광풍 당시 미국인의 ‘지식인 혐오’를 설명하며 널리 쓰이게 된 이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성적·합리적 소통이 불가능한 태도’를 뜻하게 됐다. Books가 ‘반지성주의’의 연원과 그 폐해를 밝힌 책들을 소개한다. 미국과 일본, 매카시즘·가짜뉴스·우경화 등 논의의 시작점은 달랐지만 결론은 하나. “민주주의는 이렇게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등주의와 물질주의에서 시작

반지성주의를 일상 용어로 끌어올리고, 지금껏 논의가 이뤄지게 만든 기원은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다. 그는 책에서 반지성적 태도를 가리켜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라고 한다.

이 책은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시기에 탄생했다. 미국 지식인층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했던 시기에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추적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평등주의와 실용주의에서 반지성주의의 연원을 찾는다. 나도 너만큼 똑똑하다는 ‘평등주의’와, 상아탑 지식인보다는 기업을 일구고 돈을 벌어 경제를 살린 실업가를 높게 평가하는 미국적 실용주의 말이다. 구대륙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평등주의의 땅이었고, 서부 개척 등 빠른 발전을 이뤄내면서 말보다는 행동을 더 높이 쳐준 미국 역사가 그 배경에 있었다. 한국 역시 신분제 사회와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며 평등주의 욕구가 강했고 6·25전쟁 이후 급속히 산업화를 이루면서 실용주의적이고 물질적인 태도를 갖추게 됐다.

◇유튜버는 믿고 전문가는 무시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증오하고 분노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들 모두, 자신의 관점이 아무리 극단적이거나 부족한 정보와 지식에 기초한 것일지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 의견과 똑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한다.”

2017년 미국에서 나온 이 책은 유튜브가 지금 한국 사회를 예견한 것만 같다. 미국 국제정치학 교수인 저자는 말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어설픈 지식으로 무장한 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이 전문가와 전문지식을 인정하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유튜버 주장은 신뢰하고, 기성 미디어의 주장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도처에 등장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결과물을 10년 이상 특정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 의견만큼이나 존중한다. 저자는 그 배경에 1인 1표를 행사한다는 이유로 ‘모든 의견이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는 미국 SF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를 인용한다. “민주주의가 ‘나의 무지나 너의 지식이나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

◇귀를 닫고 ‘우기기’

‘거리의 사상가’로 불리는 일본 철학자 우치다 타쓰루는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우경화하는 일본을 같은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는 “반지성주의자는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상대’를 지식과 정보와 추론의 선명함으로 압도하는 일에 열중한다”며 “세상을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편협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들의 무기는 ‘우기기’다. 그는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근거가 빈약한 데이터,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한다”고 비판했다

취임사에서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를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수라는 것만으로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반지성주의는 곧 민주주의의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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